회사원 최선영(28) 씨는 최근 3년 동안 길러온 긴 머리를 싹둑 잘랐다. 애지중지 가꾸어온 긴 머리를 자르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특히 겨울철을 맞아 짧은 머리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여러 번 망설인 끝에 단골 미용실에서 머리를 정리했다. 최 씨는 "단발머리가 유행하고 있어 분위기를 바꾸는 차원에서 머리를 잘랐다. 처음에는 조금 걱정을 했는데 주위 반응이 좋아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옛바람'(복고풍)이 거세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최근 부는 복고풍은 경기 불황과 무관하지 않다. '불황=복고'는 오랫동안 등식화되어 있는 화두다. 그래서 최근 불고 있는 '옛바람'을 탔다.
◆복고풍, '불고 또 불고'
복고풍은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국내 경기에 불황의 그늘이 드리우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8년 복고풍은 안경, 패션, 문화계 등이 주도했다. 알이 큰 사각 뿔테 안경이 유행했고 패션계에서는 빈티지 열풍이 일었다. 특히 문화계에서는 2000년대 이후 복고풍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1970년대 상영돼 인기를 끌었던 영화 '고교 얄개'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 '돌아온 고교 얄개'가 공연계 복고풍을 이끌었다. 가요계에서는 발라드 가수 테이가 패닉의 '달팽이'를 다시 불렀으며 록 밴드 럼블피쉬는 아예 모든 곡을 옛 노래로 채운 '메모리 포 유'라는 제목의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원더걸스의 '노바디'도 1960, 70년대 유행했던 여성그룹 '슈프림스'의 음악과 안무를 재구성한 것이다.
2009년에는 웨딩, 헤어디자인, 게임시장 등에서 복고바람이 불었다. 웨딩에서는 볼륨을 주면서 깔끔한 실루엣으로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한 복고풍 드레스가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5월 배우 이선균과 결혼한 배우 전혜진은 복고풍 웨딩드레스를 입어 복고바람을 더욱 부추겼다. 헤어스타일은 자연스럽게 웨이브가 들어간 물결웨이브가 유행했다. 3D가 대세인 게임시장에서는 '보글보글' '스트리트파이터' '올림픽' '너구리' '갤러그' 등 추억의 아날로그 게임이 강세를 보였다.
올해는 복고 전선이 더 넓어졌다. 복고풍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가요계, 패션계뿐 아니라 KBS2 TV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영향으로 먹을거리에도 복고풍이 불었다.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 위치한 제과점에 따르면 '제빵왕 김탁구' 영향으로 단밭빵 등 복고풍 빵 매출이 두 배 이상 늘었다.
스머프·아톰 등 향수를 자극하는 캐릭터도 다시 출현했다. 스머프는 LG전자가 출시한 스마트폰 '옵티머스원'의 광고에 등장했다. 아톰은 올해 초 내비게이션 업체 파인디지털 광고에 모습을 드러낸 데 이어 최근 아이폰 게임(아스트로보이 탭탭러시)으로도 출시됐다.
◆마케팅에도 '복고'
추억을 자극하는 '복고 마케팅'도 인기다. 고인이 된 창업자를 내세운 광고부터 복고적인 테마를 앞세운 프랜차이즈 음식점까지 유형도 다양하다. 지난 5월 첫 전파를 탄 동아오츠카의 오란씨 광고는 1970년대 유행했던 CM송과 함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 현대중공업은 고인이 된 정주영 회장의 생전 모습을 담은 광고를 방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새마을노래가 흘러나오는 '새마을식당'은 복고풍 마케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로 꼽힌다. 향수를 자극하는 실내 분위기와 메뉴로 130여 개의 지점을 갖춘 프랜차이즈로 급성장했다. 불황기에 널리 알려진 인물 또는 고전적인 캐릭터가 홍보 수단으로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비용에서 찾을 수 있다. 알리는 데 따로 돈을 들일 필요가 없어 마케팅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업시장에도 '복고'
시장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분야가 창업이다. 복고가 유행하면서 창업시장에도 복고 열풍이 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막걸리·국수 등 복고풍 메뉴를 앞세운 창업이 여전히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장기간 계속된 경기 침체로 소비심리가 위축되면서 저렴한 가격으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들이 소비자들로부터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복고풍 창업의 인기를 반영하듯 7080 소품들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인터넷쇼핑몰 '가자추억백화점'도 성업중이다. '가자추억백화점'은 복고풍 가게를 열려는 사람들이 우선 방문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달고나·쫀드기·뽑기엿·추억의 영화포스터·검정고무신·새마을담배·교련복·종이딱지 등 이색적인 아이템이 많기 때문이다.
김영문 계명대 경영정보학과 교수는 "불황일 때 소비자들은 씀씀이를 줄이기 위해 저가격대 상품을 찾게 되는데, 복고 상품이 주로 저가격대다. 소비자들이 가격이 싼 복고 상품을 많이 찾게 되면서 복고를 앞세운 창업이 늘어나고 있다. 요즘 창업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아이템은 부침개를 판매하는 것이다. 소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향수까지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불황기 복고, '이유가 있었네'
경제사정이 나빠지면 생산자, 소비자 모두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생산자는 대박보다는 쪽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고, 소비자는 얄팍해진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새로운 것보다는 친숙하고 싼 것을 골라 소비하게 된다. 복고 열풍과 불황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니는 이유다.
흰 우유의 매출 증가는 이 같은 경향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경우다. GS25가 지난해 1월부터 올해 9월까지의 우유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경기가 좋지 않을 때 흰 우유 판매량이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지난해 상반기 흰 우유 판매 증가율이 가공 우유 판매 증가율을 압도적으로 앞질렀다는 것. 회사 측은 "경기가 불황일 때 흰 우유 판매가 증가하는 것은 가격이 가공 우유에 비해 저렴하고 영양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복고가 불안한 시대를 버텨 낼 수 있는 심리적 안정장치라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살림살이가 녹록지 않을수록 사람들은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며 어려운 시기를 이겨 나간다는 것.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제빵왕 김탁구' '자이언트' 등 1970,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도 복고 바람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최근 '제빵왕 김탁구'가 불러일으킨 먹을거리 복고 열풍은 대단하다. 크라운베이커리는 크림단팥빵, 소보로빵, 슈크림빵 등 복고풍 빵을 찾는 소비자가 늘자 생산량을 2배가량 늘렸다. 올 상반기 해태제과도 '연양갱'의 매출이 작년 대비 20% 가까이 증가하자 1945년 출시 당시와 비슷하게 디자인한 '연양갱 클래식'을 선보였다. 파리바게뜨는 '제빵왕 김탁구'에 등장한 복고풍 빵을 재현한 신제품을 출시했고 삼립식품도 '제빵왕 김탁구 단팥크림빵' 등을 내놓았다. 또 '제빵왕 김탁구'에서 서인숙 역으로 출연한 전인화, '자이언트'에서 이미주 역을 맡은 황정음이 선보인 복고풍 헤어스타일이 유행을 한 것도 미디어의 파워를 반영하는 사례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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