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 경북을 걷다] (50)청송 노래산 성지를 가다

정창기 작-노래산 가는 길 한 사람이 걷고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것인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는 혼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혼자가 아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낸 누군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혼자 살기라고 스스로 외로움을 합리화해 보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국 세상은 혼자도 아니고, 혼자일 수도 없다. 당신이 잠든 순간, 밥 먹는 순간, 책을 보는 순간에도 이 세상 누군가는 당신을 떠올리며
정창기 작-노래산 가는 길 한 사람이 걷고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것인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는 혼자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혼자가 아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그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낸 누군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혼자 살기라고 스스로 외로움을 합리화해 보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국 세상은 혼자도 아니고, 혼자일 수도 없다. 당신이 잠든 순간, 밥 먹는 순간, 책을 보는 순간에도 이 세상 누군가는 당신을 떠올리며 '지금 뭐할까?'라고 궁금해할 것이다. 정창기 화백의 그림 속에는 그런 관계가 담겨 있다. 아마 그림 속 주인공은 문득 가슴 속에 떠오른 사람 하나를 찾아나선 건지도 모르겠다.

길이 사라졌다. 저 멀리 계곡 사이로 아슴푸레 무언가 있을 것 같은데 그리로 내려갈 길을 찾을 수 없다. 이래서야 '동행 길'을 알려줄 도리도 없다. 지금 서 있는 곳은 청송 노래산 정상 부위. 뒤쪽으로 청송양수발전소 상부댐인 '노래호'가 있다. 호수 물을 막은 거대한 석벽 아래 마련된 궁도장 너른 터에서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원래 계곡 아래 노래2리로 갈 작정이었다.

지금 노래2리 일대는 천주교와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공동체 마을이 형성된 곳. 하지만 100여 년 전 이곳은 극심한 박해를 피해 골짜기로 숨어든 천주교 교우촌이 있었다. 지금에야 양수발전소가 들어선 덕분에 청송읍에서 포장길을 따라 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지만 옛날에는 노래산 동북쪽에 있는 청송읍과 남쪽에 있는 부남을 잇는 산길이 지름길이었다.

지름길이라고는 해도 아는 사람만이 오가는 극히 인적이 드문 길이었으리라.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노래산과 청송읍은 가까워졌지만 남쪽 계곡길은 사라져버렸다. 궁도장 아래로 내려가 길을 더듬어보았다. 그나마 수풀이 말라버린 탓에 헤집고 나갈 수 있었다. 이런 길을 어떻게 다닐까 걱정하며 10여m쯤 헤쳐가자 제법 널찍한 터가 나온다. 계곡 옆으로 난 길이다.

돌투성이에다 낙엽이 잔뜩 쌓여있어서 길을 걷기는 수월치 않다. 하지만 구간이 길지는 않다. 계곡을 따라서 또는 계곡 옆길을 따라서 이리저리 건너기를 몇 차례. 유난히 돌이 많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금은 잡초 덩굴에 뒤덮인 돌담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인가까지 내려가려면 수백m를 더 가야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밭이 있었던 모양이다. 경작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그 밭을 보며 100여 년 전 모습이 떠오른다. 아스팔트 포장길에서도 수㎞를 거슬러와야 하는 이 골짜기에 밭이 생긴 이유는 무얼까.

유교 전통이 뿌리깊은 경북 동북부 지역에는 천주교 전파도 늦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탄압을 피해 험한 산악지대가 많은 이곳으로 찾아든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천주교 안동교구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을 옮겨보자.

'신자들은 15년 동안 거의 흉·풍년을 모르고 비교적 풍부한 생활을 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1814년에는 전국적으로 큰 흉년이 들어 가을 추수가 거의 허사가 되었고, 특히 경상도 지방은 흉년에다 수해까지 겹쳐서 양식이 없어 굶어죽은 사람들이 많았으며, 또한 남은 사람들도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죽을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때 그 전부터 자주 이 교우촌을 드나들면서 고기장사를 하기도 하고, 반(半)걸인으로 돈과 옷가지와 양식을 구걸하던 전지수란 사람이 빈궁으로 인하여 신자들로부터 받는 애긍이 차츰 줄어들자, 구걸로 받은 것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여 신자들을 밀고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한편 복수도 되고, 한편 저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약탈하여 저들의 그 오죽잖은 재물을 거침없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심보에서였다. 그는 청송현의 관장에게 가서 신자들이 그곳에 산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해 부활축일인 2월 22일에 포졸들과 함께 들이닥쳐 신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이것이 을해박해다. 노래산 신자들이 가장 먼저 체포됐고, 이어 진보현 머루산(봉화군 포산면), 영양 곧은정(영양군 일월면), 우련밭(봉화군 재산면) 신자들이 붙잡혔다. 노래산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만 모두 40명이었다. 지금 길을 더듬고 있는 이 계곡은 바로 그들이 숨어서 오가며 밭을 일구던 그 곳이었으리라. 마을로 내려서면 콘크리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공동체 마을이 형성돼 있지만 오가는 차량이 많지 않아 한적하게 거닐어 볼 수 있는 길이다. 다시 길을 되짚어 계곡을 거슬러 양수발전소 쪽으로 올랐다.

발전소 상부댐인 '노래호' 옆에는 전망대가 마련돼 있다. 맑은 날이면 영양 일월산은 물론 동해바다도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오른편 멀리 어슴푸레하나마 영양 맹동산 풍력발전단지도 보인다. 길을 내려서면 동굴 안에 터빈이 자리 잡고 있는 발전소를 지나 하부댐 '청송호'로 갈 수 있다. 댐이 들어서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망향동산'이 마련돼 있고, 지금은 물이 가득 찬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아담한 집들의 모습도 사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노래산은 애환이 많이 서린 땅이다.

한 이주민의 자녀가 남긴 시수가 새겨져 있다. '흐트러진 토담길/가난한 흙길이었어도 (중략) 손짐작으로 그려보는 마을길 손끝마다/망향의 눈물자루만 주렁주렁/마을사람들의 벅찬 마음들만/노래산 청송호에 하나 가득 모여있네.'

노래산에 오르려면 청송읍에서 914번 지방도를 따라 안동 길안 쪽으로 가다가 덕천네거리에서 왼쪽으로 길을 접어든 뒤 남쪽으로 2㎞쯤 가다가 오른쪽 '청송양수발전소'로 꺾어들면 된다. 청송읍으로 돌아가기 전 덕천네거리에서 직진하면 파천면 덕천리에 있는 '송소고택'에 닿을 수 있다. 청송 심(沈)씨의 99칸 대저택으로 1880년쯤 건립됐다. 청송 심 부자는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 부자와 함께 9대에 걸쳐 무려 250여 년간 만석의 부를 누렸던 영남의 대부호로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지금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50호로 지정돼 있으며, 한옥펜션으로 쓰이고 있다. 집 안쪽에 자리 잡은 안채 담벼락에는 특이한 구멍이 있다. 밖에서 보면 구멍이 6개이고, 안채에서 보면 3개이다. 안쪽 구멍 하나는 바깥쪽 구멍 2개로 연결된다. 남녀의 거주공간을 엄격히 구분했던 그 시절, 바깥채에 손님이 찾아오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 담 위를 기웃거리지 않고 구멍을 통해 동정을 살폈다고 한다.

노래산 동행 길을 걸어보려면 우선 차를 타고 상부댐까지 가는 편이 낫다. 거기서 비록 다듬어진 길은 아닐지라도 계곡을 따라 노래2리까기 답사한 뒤 다시 계곡을 걸어오르는 편이 좋다. 왕복해도 2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청송군 기획감사실 김무섭 054)870-6064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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