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의 만화방' 이젠 갈 곳 없는 이들의 쉼터로…

인터넷·PC방에 인기 밀려 예비 노숙인 숙소로 변신…1년씩 장기 거주자도

대구지역 만화방을 떠도는 '주거 난민'이 늘고 있다. 일정한 직업과 집이 없는 이들에게 단돈 5천원으로 하룻밤을 지낼 수 있는 만화방은 '보금자리'로 제격이다. 만화방이 갈 곳 없는 노숙인들의 쉼터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추억의 만화방'을 그리워하는 목소리도 높다.

◆힘든 이들의 쉼터

7일 오후 10시 대구 중구의 한 만화방. 건물 2층에 들어서자 찌든 담배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무협지와 각종 만화책으로 둘러싸인 130㎡ 남짓한 만화방이 3인용 소파 4개와 사우나 의자 15개로 가득찼다.

이곳에 있는 남성 20여 명은 의자에 누워 만화책을 보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기름진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는 한 50대 남성은 의자에 몸을 쪼그린 채 코를 골았다. 또 다른 남성이 뒤척이자 그가 누워 있던 의자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하룻밤 5천원(오후 10시부터 오전 7시까지)이면 이곳에서 지친 몸을 누일 수 있다.

같은 날 오후 11시 동구 신암동의 한 만화방. 계산대 옆에는 검은 가방 10여 개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이곳에서 두 달 동안 근무하고 있다는 아르바이트생 K(23) 씨는 "만화방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이 맡겨둔 짐"이라고 말했다.

만화방 유리창에는 '라면, 공깃밥 2천500원'이라는 노란색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한 손님이 소리 내어 라면을 먹자 잠에서 깬 30대 남성이 주머니에서 복권을 꺼내 한동안 바라봤다. K씨는 또 "하루 이틀 머물다 가는 손님도 있지만 1개월에서 1년까지 장기 거주하는 사람들도 꽤 있고 40대 전후로 보이는 남성들이 주요 고객이다"며 "막노동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오전 6시가 되면 일어나 대부분 만화방을 나선다"고 덧붙였다.

중년 남성만 만화방을 찾는 것은 아니다. 갈 곳 잃은 20, 30대 젊은 남성들도 만화방을 맴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모(31) 씨는 3년 전 만화방에 발을 들였다. 이 씨는 "여태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내게 모아둔 돈이 있을 리도 없고 만화방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며 "5천원을 내면 잠도 자고, 빨래도 하고, 새벽에 일을 나갈 수 있게 모닝콜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만화방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되기도 한다. 길거리와 만화방을 오가며 생활하는 서모(64) 씨는 "장기 거주자 대부분이 막노동을 하며 하루 벌어 사는 사람들이라 서로 '형님, 동생'하면서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나눈다. 어디에 어떤 일자리가 있는지 일당은 얼마나 받는지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고 귀띔했다.

◆추억의 만화방이 그립다

예전 만화방은 말 그대로 만화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다. 불과 15여 년 전만 해도 학교를 마치고 책가방을 메고 온 청소년들로 이곳은 북새통을 이뤘다. 만화방은 청소년들의 '아지트'였다. 당시 손님들이 밤을 새웠던 건 잠을 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만화책을 다른 손님이 빌려갈까봐 걱정돼서였다.

'슬램덩크'와 '드래곤볼', 이현세 만화가의 작품인 '공포의 외인구단' 등은 찾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품귀 현상이 빚어질 정도였다. 대구 비산동의 한 만화방 주인은 "예전에는 만화방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밤늦도록 만화책을 읽는 중고등학생들이 참 많았다. 정신을 놓고 만화책을 보다가 학생 엄마가 찾아와서 혼이 나며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랬던 만화방이 갈 곳 잃은 사람들의 숙식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한국에 외환 위기가 불어닥치면서부터다. 갑자기 직장을 잃은 아버지, 막노동을 해 겨우 끼니를 잇는 남성들이 밤새 만화책을 읽으며 머무를 수 있는 만화방으로 몰려왔다.

만화방 인기가 수그러진 데는 컴퓨터와 인터넷 문화의 발달도 한몫했다. 컴퓨터와 온라인 게임 등 만화책을 대체할 수 있는 오락이 늘어나자 자연스레 발길이 끊긴 것. 만화방으로 몰려오던 청소년들은 이곳 대신 PC방을 찾았다. 만화방이 예비 노숙인들을 위한 임시 숙소로 변한 것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셈이다.

이 때문에 추억의 만화방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들도 있다. 동구 신암동에서 만화방을 운영하는 이동재(53) 씨는 만화방을 금연 구역으로 만들어 청결한 환경을 유지한다.

이 씨는 "만화방이 노숙의 전단계가 아니라 예전처럼 추억의 만화를 읽는 휴식 공간으로 바뀌었으면 한다"며 "실내에서 편하게 담배를 피우고 싼값에 잠을 잘 수 있는 예비 노숙인들의 쉼터라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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