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재의 행복칼럼] 스님과 구두주걱

절에 가면 구두주걱이 없다.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절하고 나와 구두를 신으려면 애를 먹는다. 내 구두 뒤축은 물렁물렁한 것이어서 그냥 우격다짐으로 발을 밀어 넣어서는 신을 수 없다. 할 수 없이 쪼그리고 앉아 구두끈을 풀어야 한다.

몇 달 전 한 환자 가족이 와서 3년 전 자기 부인이 먹던 약을 그대로 지어달라고 했다. 시간이 너무 지나 옛날 약을 그냥 줄 수가 없다. 그러니 귀찮아도 환자를 모시고 와서 다시 진찰하고 약을 짓자고 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대뜸 반말로 "진료거부야? 이렇게 불친절해도 되는 거야? 지금 환자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의사라는 작자가 이렇게 말하는 법이 어디 있어?"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반복 설명해도 고함만 지르다 갔다. 조금 더 대꾸했다간 얻어맞을 뻔했다. 며칠 뒤 그 사람이 병원 인터넷에 고발의 글을 올렸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병원이, 그것도 의사라는 작자가 불친절하게 시민을 막 대한다.'

그 후로 자주 생각해 본다. '의사로서 친절은 무엇인가?' 의사는 병을 낫게 하는 게 원래 의무일 것인데 병은 낫지 않아도 기분만 좋게 해주면 되는 걸까? 요즘 어떤 환자들은 병원에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러 오는 것인지 아니면 유흥업소처럼 서비스를 받으러 온 건지 알 수가 없다. 목적이 흐리니까 의사들도 무엇이 잘해주는 것인지 헷갈린다.

스님들은 우리 중생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위해 구두주걱 없이 신을 신으라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직 그 깊은 뜻을 몰라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닐까? 스님들은 내 불평을 듣고 내가 환자 가족에게 들었던 그 말도 되지 않는 투정 때문에 속이 뒤집혔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못난 중생은 말 나온 김에 말을 다해본다. 절에 구두주걱이 없는 것은 스님들은 고무신을 신으니까 우리 중생들의 구두는 생각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라고 말이다.

의사들은 몇 방울의 피나 약간의 소변을 채집해 보고 간이나 신장이 나쁘다, 암이 의심 된다 등의 진단을 한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유추한다. 절간에 구두주걱이 없는 사실을 의사 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스님들은 중생들과 감정이입할 생각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스님들이 우리 중생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절에 온 손님들에 이렇듯 무심할까 하는 의심이 든다.

절에는 온갖 중생들이 다 모여드는 곳이다. 석가모니께서 중생들에 맞춰 수기설법을 하셨듯이 스님들도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을 챙겨 주셨으면 한다. 우리들은 싸구려 구두주걱 하나로도 행복해 질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가졌다. 시중에는 싸구려 식당도 밥 먹고 나오면 구두주걱은 물론이요, 커피까지 준다. 그러나 만인의 집이라는 절은 그렇지 않아 섭섭할 때가 있다. 별것 아닌 일에 울고 웃는 것이 중생이다. 모쪼록 어렵지 않은 요구는 들어주면 좋겠다. 나무관세음보살 마하살. 나무행복보살 마하살.

권영재 대구의료원 신경정신과 과장'서구정신보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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