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이명박 대통령의 역사의식

'5'16, 5'17, 5'18'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뒤바꿔놓은 역사적 사건들을 반추하는 한 주간이다. 5'16은 50주년이 지났고 5'17과 5'18은 31년이 됐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천지개벽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30년 전 오늘과 50년 전 오늘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보수와 진보의 시각이 충돌하고 여야 정치권의 역사적 인식도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래선가 5'16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국가기념일인 5'18 민주항쟁 기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언급하지 않으면서 개입하지 않는 것이 논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실용주의자'의 현명한 셈법이다.

공교롭게도 5'16 50주년이 된 지난 16일 정부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 입지를 발표하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이벤트에 당첨된 주인공은 대전이었다. 며칠 전 심사 결과를 유출하는 바람에 이번에도 '기초과학을 통해' 온 국민을 감동시키겠다는 국가 백년대계 프로젝트는 감동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탈락된 지역의 반발로 빛이 바랬다. 그래도 이 대통령은 다음 날 KAIST 개교 40주년 기념식 참석차 대전을 방문, "21세기 융합의 시대에 과학벨트는 개방과 융합의 전초기지로서 우리나라는 물론 인류를 위해 기여하는 '꿈의 벨트'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대덕과 대구, 광주가 그물망처럼 연결돼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남권 신공항을 백지화했을 때는 특별 기자회견을 갖고 건설하지 않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며 직접 대국민 설득에 나섰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자세다. 대신 1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번 결정이 국가 미래를 위한 것임을 관계장관들이 잘 설명해 달라"고 당부하는 것 외에는 과학벨트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18일 이 대통령은 5'18 기념식이 열린 광주에 가지 않았다. 자신의 임기 중 맞이하게 된 우리 시대의 역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조용하게 넘어가는 것이 현직 대통령의 현명한 처신이라는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5'16에서 5'18로 이어진 현대사는 이처럼 과학벨트 입지 선정을 둘러싼 지역갈등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났고 이 대통령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이런 시점에서 미'중 수교의 막후 주역이었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17일 출간한 '중국에 관하여'라는 회고록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밝힌 중국 지도자들의 모습이 우리 지도자와 비교되기 때문일 것이다. 키신저는 이 책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중국의 지도자들을 평가하면서 미'중 수교 과정에서의 비화들을 소개했다.

키신저가 놀랐던 것은 양국 수교를 원했던 것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다는 점과 중국 지도자들의 사고가 미국 지도자들의 사고를 뛰어넘었다는 점이었다. '핑퐁외교'라는 이름이 붙여진 수교 협상에서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지도자들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타개하려는 차원에서 양국 간 수교 협상을 서두르자 마오쩌둥은 "우리는 천 년 단위로 시간을 잰다"며 조급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오쩌둥 주석의 정신적 지도자는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이었다. 냉전의 시대를 뛰어넘어 미국과 손을 잡을 수 있게 만든 것은 수십 년간 인류를 대결과 전쟁으로 몰아넣었던 좌우의 이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럽 3개국 순방에 나선 이 대통령도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가로막았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면서 남북이 통일되는 그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통일 행보를 한 바 있다.

마오쩌둥의 시간 개념을 차용하자면 중국이 미국과 수교한 지 40년 만에 미국에 버금가는 G2로 발돋움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세계적 위상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념을 뛰어넘은 실용주의 외교를 차용한 미국과의 수교가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중국이 바라보는 세계는 그 이상인 것 같다.

남북한의 분단 역시 천 년 단위의 시간 개념에서는 일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지도자가 역사의식과 소명의식을 갖지 않는 한 통일은 물론이고 지역 간 통합도 베를린에서 잠시 맛본 기분 좋은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50년, 100년 후 미래를 통찰하는 역사의식을 담고 있는 국가지도자의 한 마디가 아쉬운 한 주간이 지나고 있다.

서명수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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