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시뮬레이션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당장 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은 낮아졌다고 안심했지만 그렇다고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독일이 서유럽을 평정한다면 총부리를 동쪽으로 돌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에 따라 1940년 9월 전쟁 계획이 마련됐다. 그 골자는 당시 소련군의 표준 전술 교리대로 강고한 방어로 독일 공격의 예봉을 차단한 뒤 대반격해서 적의 영토로 밀고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 수준이었던 당시 소련군의 상태를 감안할 때 이는 완전한 환상이었다.

소련은 이 계획을 점검하기 위해 1941년 1월 1일 도상 모의전을 실시했다. 요즘 말로 하면 시뮬레이션이다. 1차 모의전은 독소전의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와 기계화 부대장 드미트리 파블로프 사이에 벌어졌다. 주코프가 독일군 역할을 맡고 파블로프가 소련군 역할을 맡았다. 결과는 소련군의 완패였다. 소련 지도부는 일주일 뒤 주코프와 파블로프의 역할을 바꿔 2차 모의전을 실시했다. 신기하게도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소련군이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밀고 들어갔으며 독일군은 미약한 반격을 시도할 뿐이었다.

결국 시뮬레이션은 주코프의 군사적 재능만 확인해 주었을 뿐 소련이 이길지 패할지 명확하게 드러내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분명했다. 독소전 초반 소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표준 전술 교리는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으로는 이를 알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시뮬레이션의 한계다. 아무리 현실과 똑같은 환경을 만들려고 해도 현실을 그대로 모사할 수는 없다. 현실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 넘쳐난다. 어떤 변수가 어떤 규모로, 언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시뮬레이트'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이다.

최대 10조 원의 혈세가 투입되는 차기 전투기 사업(F-X) 기종 선정이 시뮬레이션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후보 3개 기종 모두 개발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다. 말문이 막힌다. 방위사업청은 "시뮬레이터(모의실험 장치)는 실제 비행 환경에서 조종사가 느끼는 체감도와 차이가 있다"고 했다. 시뮬레이션에 의한 기종 선정이 난센스임을 인정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개발도 끝나지 않은 기종을 시뮬레이션만으로 목표 시한(10월)까지 서둘러 결정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기 도입 사업 때마다 진동했던 썩은 생선내가 다시 피어오르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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