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민주주의 피로감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해를 조정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현실에서는 대화와 타협 자체가 실종되는 사태가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너무 많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피로감'을 불러오고 이는 민주주의 자체의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너무 민주적이었기에 단명(短命)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를 잘 보여줬다.

공화국은 소수 정당의 의회 진출과 사표(死票) 방지를 위해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나 그것이 공화국의 발목을 잡았다. 정당의 난립으로 양당 체제와 절대 다수당의 형성이 가로막히면서 공화국은 정치 혼란으로 날이 새고 졌다. 14년의 공화국 존속 기간 동안 총리가 14번이나 바뀌었고 정당의 수는 한때 40개에 달했다. 그러니 되는 것도 없었고 안 되는 것 또한 없었다.

이는 분명히 비정상이다. 프로이센 권위주의 정부 밑에서 유기적인 통일체라는 교육에 길든 독일인들에게는 특히 더 그러했다. 그들에게 독일 제국의회는 불가피한 이해의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공개적인 장소가 아니라 정상배(政商輩)의 '그들만의 게임'이 벌어지는 극장이었다.

그래서 공화국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대중이 자주 가는 팅겔탕겔(싸구려 나이트클럽)의 플로어 쇼에서 공화국은 끊임없는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공화국에 대한 반감은 지식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독일 작가 대부분의 지지를 받고 있던 소설가 토마스 만은 "정치가 국민을 교만하게 하고, 이론에만 매달리게 하며, 잔인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그 정치란 곧 민주주의였다. "독일 민주주의는 허울과 속임수다." 바이마르 시대의 대표적인 풍자 작가인 쿠르트 투홀스키의 말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이 히틀러에게 집권의 길을 열어준 토양이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혼란은 민주주의에 대한 독일 국민의 피로감을 생각나게 한다. 한쪽은 '방송과 통신의 융합'이라고 하고 다른 쪽은 '방송 장악'이라고 하는 끊임없는 입씨름에 우리 국민의 정치 피로감도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 비용이 편익보다 과하면 민주주의도 포기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바이마르 공화국은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울하다. 지금 한국 정치는 국민에게 너무 과도한 민주주의 비용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은 그 비용을 어디까지 부담하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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