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이야기가있는 음악풍경]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그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그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그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그다음엔 나에게 왔다./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마르틴 뇌밀러-독일 신학자)

이른 아침,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뜬다. 이른 장마가 시작되고 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비를 피해 새들이 처마 밑에 날아와 앉았다. 행여 놀랄까 싶은 마음에 까치걸음으로 뒷걸음질쳐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얼마 전부터 비가 오면 새들이 처마 밑으로 날아들었다. 밤이면 부리로 나무 벽을 쪼아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불을 켜기도 했지만, 그것이 새들이 비를 피해 잠깐 머물다 간다는 신호라는 것을 알고는 행여 그들을 쫓을까 마음을 졸였다. 무엇인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숲 속에서 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은 가끔 이렇게 가슴을 설레게 한다.

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며칠 전 회사로 찾아온 후배의 말을 떠올렸다. "형이 이렇게 변할 줄 몰랐어요" 이십여 년 만에 만난 후배는 당신이 변한 모습을 알고 있느냐는 듯이 상기된 얼굴로 항의하듯 말했다. 시를 쓰는 목사가 되겠다던 친구였다. 대학졸업을 앞둔 봄날, 그는 시를 버렸고 꿈을 접었다. 그리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해 6월, 우리는 최루탄이 빗발처럼 쏟아지던 거리에서 다시 만났다. 무장한 백골단과 전투경찰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를 때, 아스팔트 위에서 그와 함께 누워 바라본 하늘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형 두렵지 않으세요" 푸르게 빛나던 하늘을 보며 그가 말했다. 최루탄이 쏟아졌고 대열 위를 군홧발이 밟고 지나갔다. 고문으로 꽃다운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서도 당당한 권력 앞에 우리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때로는 세상과 타협하면서 젊은 날의 신념은 젊은 날의 것이라고 그저 추억 같은 것이라고 외면하며 살아왔다. 먹고사는 것의 대의(?)는 살아남는 것을 가르쳤고 그것은 적당한 타협과 외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안하다. 그냥 선하게 살고 싶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그것을 변명이라고 하느냐고 소리치며 항의하는 것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전 형이 더 당당하길 바랐어요" 긴 침묵 끝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차라리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에 산다고 자랑하길 바랐어요." "그게 세상을 잊은 대가라고 말하면서." 그는 선배의 비겁함을 에둘러 말하고 있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해고 노동자의 피맺힌 절규도 가난한 이웃의 아픔도 죽음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비명도, 우리가 지우고자 했던 세상의 부조리는 아직도 우리 곁에서 신음을 내며 앓고 있었다. 오직 변한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후배는 행복한지 묻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애써 외면하고 있는 세상에 자유로운지 묻고 있었다. 그리고 행여 지금 당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은 젊은 날을 팔아 산 것이 아닌지 확인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분명 그는 질책하고 있었다. 김수영이 말한 것처럼 작은 것에만 분노하면서 마치 그것이 세상의 정의인양 큰소리치는 모래알보다도 작고, 바람과 먼지보다도 작은 용기를….

다시 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형, 아직도 사람이 희망인 세상을 믿으세요?" 그 말은 아주 오래전, 성직자를 꿈꾸었던 그에게 한 것이었다. 신이 아닌 인간이 희망인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라고 힘주어 말했던 그 말이 이제 부메랑이 되어 날아들었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어깨 위로 어둠이 짙게 깃들고 있었다. 커피숍, 스피커에서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가 흘러나왔다. 낡은 유모차를 끈 할머니가 커피숍 앞에 놓인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는 눈빛이 부끄러움보다는 두려움으로 와 닿는 것은 매번 작은 것에만 분노하는 비겁한 우리의 시선 때문이다. 눈물처럼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다. 날개가 젖은 어린 새들은 어찌 날 것인가?

전태흥 미래TNC 대표사원 62guevara@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