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의 역사(상)
간호의 역사를 다루기에 앞서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간호인을 부르는 용어로 '간호부, 간호원, 간호사'가 쓰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1907년 대한의원에 간호부 양성소가 설치된 뒤 '간호부'(看護婦)라고 불렀다. 이때 부(婦)는 '며느리, 아내'처럼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다가 1945년 광복 이후 '간호원'(看護員)으로 바뀌며 남녀 성의 차이가 없어졌다. 이후 1987년 의료법 개정과 함께 현재의 '간호사'(看護師)라고 부르게 됐다. 하지만 이는 법적'제도적 명칭 변화일 뿐이고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에도 '간호원'이라는 말이 쓰였다. 기사 중에 간호인력을 일반명사처럼 쓰이는 경우에는 '간호사'로 칭한다.
◆초기 간호인력은 선교사와 기독교인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인 알렌은 1885년 설립된 제중원과 관련한 필요 인력을 언급하며 '보조원, 간호인, 잡부로 일할 사람들'을 들었다. 당시 전문적인 간호인력이 양성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간호업무와 의사 지시사항을 해내는 인력은 제중원 의학당 생도들이었다. 하지만 생도 모집 전까지 약제사 겸 간호사로 일한 것은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그러던 중 알렌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이유로 여성 의료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양반가 부인들도 상당수 제중원을 찾았는데, 문제는 이들 때문에 병원 내 다른 환자들의 왕래를 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남녀칠세부동석'을 이유로 다른 환자는 물론 남자라면 병원 내 다른 직원들도 멀리 해야 했고, 결국 양반가 부인들의 치료를 거절할 상황에 처했다. 조선 정부는 총명한 관기들을 뽑아 제중원에서 의술 일을 배우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채 4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자 정부는 서울에 최초로 피병원을 세웠다. 시설은 보잘것없었고, 치명률은 75%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책임자였던 애비슨이 "의사와 간호원의 정성스러운 구호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환자는 죽어버렸다"고 한 점으로 미뤄볼 때 서양 선교간호사들이 간호를 담당했던 것 같다. 1895년 당시 우리나라의 서양인 의사는 23명에 이르렀지만 서양인 간호사는 4명에 불과했다. 부족한 간호인력은 대부분 서양인 선교사들과 조선인들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교회도 콜레라 피병원을 운영했다. 이곳에서 콜레라 환자의 간호를 맡은 사람들은 서양인 간호사 및 선교사, 조선인 기독교인, 관청에서 고용한 조선인 등이었다. 조선인 대부분은 기독교인으로 남녀와 계층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육체노동 경험이 없던 양반들도 처음에 망설였지만 훈련을 받은 뒤 훌륭한 간호인력으로 헌신적으로 일했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선교사 피병원의 환자 회복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로 '기독교인들의 양심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간호'를 들었다.
◆1903년 보구여관에서 최초 간호교육
서양 선교사들의 간호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본격적인 교육에 나섰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간호교육은 1903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병원이 있던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시작됐다. 보구여관은 1887년 서울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이다. 감리교 의료선교사였던 스크랜트 목사가 조선의 풍속 때문에 여성만을 위한 병원 설립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가 이를 승인해 이뤄졌다. 그해 10월 감리교 여의사인 하워드가 이화학당 내에서 여성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시 민비(閔妃)는 의료사업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뜻으로 이 병원에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바로 이곳에 여성 의료선교사 마가렛 에드먼즈(Margaret Edmunds)가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했다. 우리 역사에서 '간호원'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에드먼즈는 1906년 감리교 선교본부 보고서에서 '감리교부인병원(보구여관)에서 1903년 간호원양성소를 열 때 조수이던 몇 명이 입소를 지원했고, 현재도 2명이 교육 중'이라고 했다.
입학 연령은 21~31세였고,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부모 승낙이 있어야만 입학할 수 있었고, 학과에 방해되는 집안일은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학생들은 한복과 양장을 복합해 개조한 교복을 입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 제복이었다. 1906년 1월 25일 학생 김마르타와 이그레이스가 가관식을 갖고 수료증을 받아 우리나라 첫 간호사가 됐다.
1906년 쉴즈(E.L.Shields)가 만든 세브란스병원 간호양성소와 합친 뒤 1912년 동대문에 현대식 건물을 짓고 해리스기념병원이라고 불렀으며, 1930년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1945년 이화여대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바뀌었다.
◆대한의원에서도 간호부 양성 시작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1907년 대한제국 의료기관인 광제원, 의학교 부속병원, 적십자사병원을 하나로 합쳐 '대한의원'을 만들었다. 대한의원은 개원 당시부터 산파와 간호부를 두었다. 1907년엔 간호부 10명, 1908년엔 간호부 38명, 1909년 간호부 50명이 있었다. 1910년엔 간호부만 거의 6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 간호부는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1907년 3월 10일에 반포된 '대한의원 관제'에는 위생부, 치료부, 교육부 등 3개 부서를 두었고, 교육부에서 의사, 약제사, 산파, 간호부를 양성하도록 했다. 우리나라 정부기관이 근대 간호교육을 시작한 원년인 셈이다.
그러나 교육기능은 빈약했고, 이 때문에 1909년부터 의학교육을 병원 업무에서 분리시켰다. 의사, 약제사, 산파, 간호부 양성을 위해 따로 부속의학교를 두도록 한 것. 수업연한은 의학과 4년, 약학과 3년, 산파과와 간호부과는 2년이었으며, 입학정원은 의학과 50명, 약학과 10명, 산파과 10명, 간호부과 20명이었다. 입학자격을 18~25세 품행이 방정하고 신체검사와 입학시험에 합격한 자로 제한했다. 간호부과 입시과목은 독서와 간단한 작문이었다. 아직 교육제도가 완비되지 않아 응시자의 학력 규정은 없었다. 수업료는 무료였으며, 식비'피복비'잡비를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아울러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들 간호부과 모집생들은 정식으로 졸업하지 못했다. 오히려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빼앗긴 뒤 수난의 역사를 맞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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