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클어진 바람은 종잡을 수 없이 방향을 바꾸며 나지막한 풀꽃들을 어지러이 흔들어댄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은 금방이라도 폭풍우를 토해낼 듯 묵직한 그림자로 대지를 내리덮는다. 키 큰 나무들조차 바람이 힘겨운 듯 한쪽 어깨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잎을 떤다. 그럼에도, 낮은 언덕에는 노란 풀꽃들이 키 낮은 돌담을 의지 삼아 옹기종기 모여 있다. 황야는 그렇게 그 넓은 품으로 바람을, 구름을 받아내고 있다.
영국 중부지방 맨체스터 북쪽에 있는 작은 마을 하워스(Haworth). 끝없는 황야와 거친 바람, 변덕스러운 날씨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이 마을이 유명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소설 '폭풍의 언덕'의 실제 마을
하워스는 소설 '제인 에어'의 작가 샬롯 브론테(1816~1855), '폭풍의 언덕'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1818~1848), '아그네스 그레이'의 작가 앤 브론테(1820~1849) 3명의 자매가 비극적인 짧은 생애를 살며 작품 활동을 한 고향마을이다. 특히 에밀리의 유일한 작품이자 걸작인 '폭풍의 언덕'의 실제 배경으로 사랑받고 있는 곳이다. 세 자매가 거친 바람이 부는 황야를 거닐며 사색하고 서로 격려하며 작품을 썼던 곳이다. 학창 시절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그 처절한 광기의 사랑에 전율하며 작품의 무대가 되었을 법한 황야를 떠올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어했을 것이다. 문학 작품의 향기를 느끼며 그 쓸쓸한 감상에 흠뻑 젖어볼 수 있는 곳이다.
하워스로 가는 길이 쉽지는 않다. 런던에서 출발한다면 킹스크로스 역에서 기차를 타고 몇 번씩 환승하거나 버스로 갈아타고 가야 한다. 가는 길만 줄잡아 3시간은 잡아야 한다. 하지만, 긴 시간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열차를 타고 가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영국 시골의 풍경이 여정 내내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다. 먼 지평선까지 뻗은 들판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나라의 그것과는 색다른 감흥에 빠지게 된다. 환승을 위해 들르게 되는 리즈(Leeds)와 키흘리(Kighley)도 짧은 시간이나마 둘러보면 재미있다. 특히 리즈는 500년이 넘는 유서깊은 도시로 환승 시간을 이용해 역 주변 지역만 살짝 다녀도 볼만한 곳이 제법 있다.
키흘리는 하워스 마을에 이르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면 마을 입구에서 내릴 수 있다. 시간이 맞는다면 키흘리~하워스를 운행하는 증기 열차를 타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이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골짜기를 달리는 증기 열차는 그림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자매들의 흔적, 목사관 박물관
'폭풍의 언덕'을 떠올려 마을 풍경 또한 황량하기만 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을 입구에 도착해 벽돌로 깔끔하게 포장된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길 양편으로 예쁜 카페, 식당, 서점, 선물가게 등이 줄지어 있다. 수많은 팬이 찾는 곳으로 약간은 관광지가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하기야 소설이 나온 150여 년 전에도 그의 소설을 읽은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덕길을 다 올랐을 무렵 왼편으로 처음 만나는 곳이 브론테 자매의 아버지인 패트릭 브론테가 목사로 있던 교회다. 교회 마당에는 수천 개는 될 듯한 수많은 묘비석이 누워 혹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 브론테 자매들을 찾을 순 없다. 자매들의 유해는 교회 지하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 교회 뒤로 브론테 가족이 살던 목사관이다. 목사관은 현재 브론테 목사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1820년부터 1861년까지 브론테 가의 소유였던 2층 집 전시관에는 가족들이 사용하던 물건들과 책, 편지, 옷가지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에밀리가 가족들을 위해 연주하던 피아노, 그녀가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던 검은색 작은 소파, 자매가 뜨개질하며 서로 상상에 대해 정담을 나누었을 작은 방은 오래도록 방문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벽에는 유일한 남자 형제인 패트릭 브란웰(그는 아버지의 이름과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았다)이 그린 자매의 초상화도 보인다.
세 자매의 삶에 죽음은 항상 곁에 있었다. 목사관 2층 그들의 방 창문 너머로는 늘 교회묘지가 보였다. 수많은 묘지석들이 서 있는 황량한 묘지를 그들은 늘 바라보며 살았다. 어머니는 막내 앤이 한 살 때 돌아가셨다. 그들은 아버지와 이모 손에 자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야 했다.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그리 길지 못했다. 1848년 겨울 에밀리가 서른 살에 폐결핵으로 죽자, 이듬해 5월 앤마저 세상을 등졌다. 언니 샬롯은 동생들의 죽음을 모두 지켜본 후 1855년 3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버지 패트릭은 이 자식들을 모두 가슴에 묻고도 8년이나 더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했다.
◆더 많은 곳을 보려면
브론테 박물관 뒤로 그들의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는 무어(Moor)라는 언덕이 펼쳐져 있다. 영국식 돌담이 여기저기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둘러쳐진 들판을 넘으면 히스가 무성한 황야가 펼쳐진다. 키 낮은 풀들이 거센 바람을 맞으면서도 용케도 꽃을 피워내고 있다.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브론테 다리'를 지나 실제 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라는 톱 위슨즈(Top Withens)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5㎞가 넘는 거리. 왕복 3시간 이상은 생각해야 한다. 이 황무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땅이지만 에밀리 팬들에게는 마치 당연한 순례의 코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순례길'의 끝 부분에 있는 톱 위슨즈에는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는 벽돌집 폐허도 볼 수 있다. 이 순례길을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면 런던에서 조금 이른 시간에 출발하는 것이 좋다. 자칫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소설의 기분을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비바람이 부는 궂은 날씨가 더 제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땐 반드시 비옷을 챙겨야 한다. 비교적 날씨가 좋은 여름이라도 하워스엔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른다.
영국 하워스에서 홍헌득기자 duckdam@msnet.co.kr
◆가는 길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리즈를 거쳐 키흘리로 가는 기차(Skipton행)가 30분 정도 간격으로 있다. 트레인라인(www.thetrainline.com) 등 기차표 예매 사이트에서 날짜, 시간대별 할인표를 구할 수 있다. 요일, 시간에 따라 요금이 천차만별이므로 자신에 맞게 선택한다. 키흘리 역에서 버스 스테이션까지 도보 5분 거리. 키흘리 시내에서 하워스까지 663, 664, 665, 720번 버스가 정기적으로 운행한다.(Bus station 문의). 15분 소요.
▷키흘리~하워스 증기기차 시간(http://www.kwvr.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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