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여름의 친구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꽃이 피는 봄, 단풍이 물드는 가을은 들놀이와 산놀이에 알맞은 철일 뿐이다. 꽃방학, 단풍방학을 두는 나라도 있다고 하지 않나.

책 읽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여름이다. 겨울은 추워도 사진을 찍기에는 아주 좋다. 거목들도 잎을 떨어뜨린 채 가지만 남기고 있어 높은 산의 능선, 전통한옥과 사찰의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사진 프레임 안에 고스란히 진면목을 안겨준다. 하지만 여름은 무성한 녹음 탓에 천하의 절경도 반쯤은 갇혀버린다.

이래저래 독서의 계절은 여름이다. 너무 더우니 친지의 집을 방문하는 것도 본의 아니게 실례가 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형국에 예의범절을 지키느라 옷을 차려입은 채 함께하는 것은 정말 힘이 든다. 혼자 조용히, 가능하다면 시원한 그늘 아래에 누워 선현들의 지혜를 읽는 것이 최고의 피서이다.

물론 이런 통찰은 이미 선현들이 다 가르쳐 준 것이다. 정조는 "더위를 물리치는 데는 독서만한 방법이 없다"고 갈파했고, 허균도 "더위를 이기는 데는 독서가 최고인데, 술까지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고 했다. 하지만 허균의 발언은 독서보다 술에 더 방점이 찍히는 것 같아 주제일탈의 오류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도 책과 술잔을 나란히 즐기다가 매미소리를 들으며 낮잠에 빠져든다고 해서 그것까지 나무란다면 우리네 삶이 너무 팍팍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허균식 피서는 서민들에게 '그림의 떡'도 아니다. 그토록 한가한 여유가 있다면 그는 이미 서민이 아니다. 하릴없이 나는 방 정리나 한다. 주변이 깔끔해지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땀을 흘리며 정리정돈을 하던 중 뜻밖의 '부채'를 만났다. 기대 밖의 이 물건이 내 마음을 에어컨처럼 서늘하게 만들어 주는 부채 노릇을 했다.

중학생 때 교내 백일장 운문 부문에 입선했던 '친구'가 발견된 것이다. '나 홀로 가는 길에/외롭지 않도록 피어 있는 꽃/향기가 짙지 않아 은은함이 있고/겉모양이 화려하지 않아 편안함이 있는/그 꽃의 이름은 친구입니다//내게 가장 잘 어울리며/귀한 빛을 낼 수 있는 보석/값지지만 사치롭진 않고/지닐수록 그 멋을 더하는/그 보석의 이름은 친구입니다//믿음이 있는 한 영원할 수 있고/사랑이 있는 한 배려할 수 있는/거울 속에 비친 또 하나의 나/그 이름은 바로/친구입니다'

정약용은 여덟 가지 피서법 중 하나로 '비 오는 날 시 쓰기'를 제시했다. 중학생 때 쓴 시 같지 않은 시를 읽으며 나는 '여름의 친구는 독서와 글쓰기'라는 말이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중학교 백일장 이후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은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으리라.

정연지<대구미술광장 입주화가 gogoyon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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