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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의 시와 함께] 이야기 들어줄 사람-김광규(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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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세차게 불어오던

시커먼 비바람 멈추고

동녘이 환하게 밝아오자

밤새 숨죽이던 사람들

모두들 저마다 떠들어댔지

그는 혼자서 가만히 있었어

두려운 밤 함께 지새며

슬픈 일 억울한 일 가리지 않고

하찮은 이야기라도 귀담아

들어주며 고개 끄덕이고

빙긋이 웃어 주던 사람

조용한 눈길과 낮은 목소리

큰 귀와 꾹 다문 입

낯익은 그의 얼굴 사라져 버리고

부드러운 그의 손 잡을 수 없네

그와 닮은 사람들 어디에나 있지만

말없이 이야기 들어줄 사람

이제는 아무도 없네

-시집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문학과지성사, 1998)

세상에는 이슬 같은 사람이 있다. 칠흑 같은 밤에도 별빛을 영롱하게 머금고 세상 사람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의 빛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고귀한 존재다. 하지만 아침이 밝아오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 그런 사람 있었냐는 듯 까맣게 잊고 대명천지를 누비고 누린다.

나무는 과거를 절대 잊지 않고 나이테에 새긴다. 물고기는 지난 세월을 비늘에 새긴다. 사람은 어디에 새겨야 할까. 어려운 시절을 잘 망각하는 사람들의 생리를 잘 아는 현자들은 마음에 새기거나[銘心] 뼈에 새기라고[刻骨] 강조했다.

사람은 어려운 시절을 잊지 않아야 한다. 특히 좋을 때일수록 깊이 되새겨야 한다. 풍요로운 가을이면 겨울이 코앞이라는 뜻이다. 이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장 어려운 곳-죽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백주대로를 걸을 때일수록 뼈에 새긴 '이슬'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어둠이 오기 전에, 전에도 너무 늦기 전에. 세상에는 백주대로에도 이슬이 필요한-하소연을 하고 싶은-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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