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미친 약속

문정희(1947~)

창밖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풋열매가 붉고 물렁한 살덩이가 되더니

오늘은 야생조의 부리에 송두리째 내주고 있다

아낌없이 흔들리고 아낌없이 내던진다

그런데 나는 너무 무리한 약속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때 사랑에 빠져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미친 약속을 해버렸다

감나무는 나의 시계

감나무는 제자리에서

시시각각 춤추며 시시각각 폐허에 이른다

어차피 완성이란 살아 있는 시계의 자서전이 아니다

감나무에게 변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집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 2012)

빅토르 위고는 청소년 시절에 자신의 일기장에 "샤토브리앙처럼 살 것,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며 살았다. 샤토브리앙은 당시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다.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프랑스 대혁명기의 샤토브리앙이 그랬듯 위고도 문인으로서는 행복했고 정치가로서는 불행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두 가지 분야에서 정점에 이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문인으로 정상을 경험한 위고는 십 년간 글을 쓰지 않고 정치활동을 했다. 결국 '2월 혁명' 때 추방되어 18년간 이방을 떠돌며 고초를 겪었다. 이때 그는 문인으로 돌아가 「레미제라블」등을 썼다. 귀국 후 문인으로 추앙받으며 여생을 살았다. 그는 문인이었던 것이다.

감나무가 계절 따라 변하는 것 같지만 해마다 감나무로 거듭난다. 우여곡절을 겪는 인생도 결국 저마다의 몫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다. 욕망을 부릴 때와 내려놓을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목하, 현재, 감나무가 잎을 버리고 있다. 곧, 홍시도 하나 둘 사라져갈 것이다. 정상을 구가하고 돌아서는 모습이 저러해야 할 것이다.

시인 artand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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