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공연 목적과 얼굴 비추기

공연을 보러 갔는데 앉아있기 참 힘든 경우가 있다. 내 예술적 소양에 비해 수준이 너무 높아 이해하기 힘들거나, 아니면 반대로 완성도가 낮고 너무 재미가 없어 봐주기 힘들 때가 그렇다. 이런 경우엔 앉아있다가 어느새 눈이 스르르 감긴다. 잠을 잘 수도 없고, 계속 지켜봐도 머리만 아프고 급기야 가슴까지 답답해 오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면 피치 못할 선택을 해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 문을 나서는 것이다.

로비를 지키고 있다 보면 공연 중에 로비로 나오는 관객들이 있다. 처음 순진할 땐 '최악의 상황에서 피치 못할 선택을 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겪은 고통의 시간을 이해하려 했다. 그런데 밖으로 나왔으면 공연에 대해 욕이나 실컷 하고 갈 일이지 로비에 앉아서 자기네들끼리 뭐가 좋은지 재잘재잘 수다를 떤다. 조금 있으면 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몇 분 전까지 무대 위에 있던 아티스트가 의상, 분장 그대로인 채 로비로 나온다. 그들은 만나서 한참을 이야기꽃도 피우고, 사진도 찍고, 그러다 아티스트는 분장실로 돌아가고 관객들은 다시 문을 열어 달래서 객석으로 들어간다. 출연진이 많고 그것도 여러 팀으로 꾸려진 공연일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멋지게 턱시도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분들이 떼로 로비에서 관객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데, 당최 여기가 공연이 끝난 로비인지 공연 중인 로비인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다.

상황의 원인을 파헤쳐 들어가 보면 이렇다. 출연 아티스트는 선생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다. 관객은 그들의 제자일 경우가 많다. 독주회라면 그럴 수 없지만 프로그램이 여러 꼭지이고, 출연자가 여러 명이라면 자기 출연순서가 아닐 때 로비에서 제자들과의 상봉이 가능하다. 선생과 제자 사이, 가족들 사이, 친구들 사이, 그리고 동료 선생들 사이까지, 이렇게 여러 가지 조합으로 로비상봉은 공연 중 벌어진다. 이런 공연에는 지연 관객도 참 많다. 왜? 처음부터 안 봐도 되니까.

그러다 센스(?)있는 관객도 보았다. 1시간 30분 정도의 공연이면 1시간 10분쯤 지나 로비에 나타난다. 객석에 안 들어간다. 로비 모니터로 그날 공연의 분위기를 파악한다. 공연이 끝나면 분장실 출입구 가까운 쪽에 자리 잡고 있다가 로비로 나온 아티스트와 제일 먼저 인사하고, 덕담 몇 마디 주고받고, 사진까지 찍어주고 유유히 공연장을 빠져나간다. 그대를 '얼굴 비추기의 달인'으로 명합니다!

연극만 하고 살 땐 몰랐는데 세상에는 두 부류의 공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연이 목적인 공연과 얼굴 비추기가 목적인 공연이 있다는 걸.

최영(수성아트피아 공연기획팀장) furyo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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