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人 세계In] <23>남조남 민단 동경지부 의장

두 번 밀항 끝에 정착한 일본, 플라스틱 공장 성공 열매…경북도민회 이끌

한국과 일본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오가는 삶이라면 지치고 힘들지는 않을까. 남조남(南照南'69) 민단 동경지부 의장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요. 그간 한국에서 겪은 안 좋은 기억들도 있지만, 어쨌든 고향은 고향이잖아요."

그의 고향은 안동이지만 할아버지가 양자로 가는 바람에 의성에서 태어났다. 9세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해 27세 때 성공한 재일교포로 한국에 플라스틱 사출공장을 세우기 위해 되돌아왔다. '금의환향'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일본에서 가져온 기술로 1970년대 한국의 전자산업 발전에 적지않은 공헌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에는 자신이 세운 업체와 친척들이 있기에 자주 온다. 민단과 경북도민회 활동을 위해 방문하기도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을 찾았다. 한식날 칠곡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 옆에 할머니 산소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평생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무대로 살아온 그의 인생 역정을 들어봤다.

◆일본에 밀항하다

6'25전쟁 때 그는 가족과 함께 의성을 떠나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초교 2학년 때인 1952년 일본에 자리 잡고 있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할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서 밀항선을 탔다. "작은 통통배를 타고 밤에 대한해협을 건너던 기억이 생생해요. 노인, 여자, 어린아이 등 10여 명이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는데 경찰에 붙잡혔어요. 그래서 다시 부산으로 송환됐는데 몇 달 후에 또다시 밀항을 시도해 겨우 도쿄에 있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어요."

그와 할아버지, 어머니는 밀항에 성공했지만 다른 배를 탔던 할머니, 누나, 고모, 막냇삼촌은 두 차례나 밀항에 실패하고 만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았던 시점이라 이들 가족은 두 나라로 갈려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남북뿐만 아니라 한일 간 이산가족도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도쿄 한국학교를 거쳐 릿쇼(立正)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도움으로 작은 공장을 세웠다. 일남화공(日南化工)이라고 이름붙인 소규모 플라스틱 사출 공장이었다. 직원 10여 명을 두고 24시간 공장을 돌렸는데 당시 일본의 경기호황에 힘입어 사업이 무척 잘됐다고 한다.

인터뷰 자리에 동석한 부인 허경순(66) 씨의 얘기다. "21세 때 오사카에서 시집을 온 이후로 정말 바쁘게 살았어요. 공장 2층에 살림집을 차렸는데 시아버지 모시고, 직원들 밥도 해주고, 우리 아이 셋 키우고, 밤에는 사무실 전화까지 받아야 하고…. 힘든 시절이었죠." 부인의 내조가 없다면 남자의 성공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한국에 돌아오다

그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1971년 인천 주안공단에 공장을 세우면서다. 재일교포의 자본'기술력이 한국에 몰려들기 시작한 때였는데 그는 플라스틱 사출 공장을 운영하며 대우전자에 납품을 했다.

"당시 일본의 플라스틱 사출 기술은 세계 최고였어요. 당시 한국에는 사출 제품을 만들 변변한 기술이 없었기에 저희 회사는 엄청나게 큰 환영을 받았지요. 전자제품의 플라스틱 외부 케이스를 만들어 납품했는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는데도 물량이 달릴 정도였죠," 그는 초창기에 해마다 매출이 두 배 정도 증가하는 고속성장을 했고, 직원 수도 한때 1천 명에 달했다. 당시 그는 1년 중 절반을 한국 공장에서, 나머지 절반을 일본의 공장에서 지냈다.

20년 전에는 자신의 출생지인 의성에도 공장을 세워 고향에 작은 '보답'을 했다. 직원 100명에 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 케이스, 운전석 패널 등의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4년 전 김관용 경북지사가 공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현재는 이 회사의 주식 일부만 갖고 있을 뿐 경영에 손을 뗐고, 친척이 경영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는 도쿄 북쪽의 사이타마현에 있는 회사도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민단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민단 활동에 전념하다

"민단 활동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과 봉사 정신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죠. 돈도 많이 내야 하고 모든 민단 행사에 참석해야 하니 바쁘긴 하지만, 삶의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도쿄 시나가와 지구의 민단 간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청년 시절부터 민단 활동에 뛰어들었다. 동경 한인상공회의소 감사를 거쳐 현재는 민단 동경지부 의장과 경상북도 동경도민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그는 김관용 지사와 스스럼 없이 전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그에게서 경북도민회 활동 얘기를 들으면서 금방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2010년 구제역 파동 때 경북도민회가 모금한 2천만원을 들고 김 지사를 방문했고, 2006년 김천 전국체전 때에는 재일교포 선수단 단장으로 선수단을 이끌고 참가했다고 한다. 경북도민회에서 오랫동안 큰 활동을 해왔기에 김 지사와 친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에 재일교포의 공헌이 무척 컸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과거 한국의 경제 부흥기에 교포들이 한국에 돈을 많이 들고 들어가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농촌 마을마다 교포들이 만들어준 다리, 도로가 없는 곳이 없지요." 한국에 재해'수해 등이 있을 때마다 재일교포들이 모금한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2008년 서울 남대문 화재 때에는 민단 간부 등이 100만엔씩 내 모두 2천만엔(2억4천만원)을 기부했고, 1988년에는 올림픽을 앞두고 모든 재일교포들이 참여해 100억엔(1천400억원)을 모아 전달했다고 한다. 한국이 잘살게 되면서 과거 재일교포들의 헌신과 원조를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이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갈수록 재일교포의 숫자가 줄어드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예전에는 80만 명의 교포가 있었는데 3, 4세가 대거 귀화하면서 이제는 절반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교포들의 민단 참가율도 계속 줄어든다고 했다. 일본에 대한 한국 정부'국민들의 감정적 대응도 교포 사회를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도 했다.

"교포 2세들이 없어지고 나면 과연 교포 사회가 제대로 유지될지 걱정스럽기도 해요. 그렇더라도 한국 정부와 재일 한국인, 교포들이 서로 협력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인으로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일본 도쿄에서 글'사진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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