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건배사

나라마다 술 문화는 조금씩 다르지만 건배나 건배사에 관한 풍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건강과 사랑, 축하가 주를 이룬다. 영어권에서 건배할 때는 '치어스'(Cheers)나 '바텀스업'(Bottoms up), '토스트'(Toast) 등 여러 표현을 쓰는데 토스트는 17세기 영국에서 술잔에 토스트빵 한 조각을 넣은 데서 유래했다. 불어권에서는 '너의 건강을 위해'라는 뜻의 '아 보뜨흐 상떼'(a votre Sante)를 외치면서 잔을 맞대고 스페인어권은 '건강과 사랑과 돈을 위해'를 줄여 '살루드'를 외치는 건배사가 보편적이다. 독일어권은 '프로지트'(Prosit), 북유럽은 '스콜'(건강)이다.

인류 역사에서 건배는 술의 시작과 궤를 같이하지만 건배의 풍습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신과 의심의 산물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고대 로마시대 지중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카르타고의 병사가 로마군이 즐겨 마시는 포도주에 독을 탄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후 로마에서는 반드시 건배를 하고 독이 들지 않았음을 확인시키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건배사로 치자면 우리만큼 유별난 나라도 드물다. 군사문화 탓에 1980, 90년대에는 '위하여'가 대세였지만 요즘은 지화자, 통통통(소통'대통'형통), 소화제(소통과 화합이 제일) 등이 단골 메뉴다. 송년회 모임이 잦은 이맘때는 '너나 잘해'(너와 나의 잘나가는 새해를 위해) '오바마'(오직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등 건배사도 때와 자리에 따라 그야말로 백가쟁명 식이다.

삼성그룹이 12월 송년회 술자리에서 벌주와 원샷, 사발주(돌려 마시기) 등 3대 음주 악습을 몰아내는 운동을 펴고 있다. 한 명씩 일어나 건배를 제의하는 건배사는 허용하되 어감이 이상하거나 폭음을 유발하는 지나친 건배사는 자제할 것을 주문했다. 또 삼성은 올해부터 신입'경력사원 교육이나 임원 교육과정에서 '절주'를 필수 과목으로 정했다.

폭탄주와 마찬가지로 직장인들 사이에서 건배사가 거북할 때가 많다. 화합하고 친목을 다지자는 소리는 좋은데 왠지 비싼 술 마시니 입부조라도 하라는 소리로 들려서다. 평소 싱숭생숭하다가 유독 술자리에서 너나 가릴 것 없이 마음에도 없는 말 한마디씩 해야 하는 것은 사실 고역이다. 진정 상대의 건강과 행운을 빌고 조용히 술잔을 들어보이며 눈으로 마신다면 시끌벅적한 송년회도 한결 품격이 올라가고 화합도 절로 도모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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