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꼬마 때 성탄절이 기다려지던 여러 가지 이유들 가운데 과자 종합선물세트를 선물 받는 것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종합선물세트는 뻔한 내용물들을 가짓수 채워 어린이날, 설날 식으로 껍데기만 바꿔 내놓은 상술이지만, 그래도 성탄절은 조금 달랐다. 난 특별히 빨간 플라스틱으로 된 장화 모양의 크리스마스 세트를 좋아했다.
종합선물세트를 받으면 나는 제일 맛없는 과자부터 먹었다. 맛있는 것부터 먹을 건지, 반대를 택할 건지 사람마다 선택은 다를 것이다. 난 그것도 각자의 인생관이라고 본다. 사건 하나가 있었다. 싫어하는 감자 스낵 따위부터 먼저 먹으며 며칠을 아껴둔 초콜릿이 따뜻한 전기장판에 진득하게 녹아버린 일이었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난 내가 마지막까지 남겨두고픈 초콜릿이 뭔지 종종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은 종합선물세트와 비슷하다. 이것저것을 한 상자에 구겨 넣어 제목 붙여 놓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평론가, 교수, 기자, 큐레이터, 학자, 기획자. 스스로 부르기에도 모자람이 많아 부끄러운 그 직함들이 내가 거쳐 온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일만 해도 그렇다. 사회학, 생물학, 미학, 통계학, 정치학, 심리학, 음악학, 영화학, 논술 수업이 내가 돌아가며 맡는 강좌다. 모든 걸 예술사회학이란 분야로 통합하더라도 내 얕고도 산만한 공부는 예술과 사회라는 애매한 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왜 한국에서 예술의 진보와 정치의 진보는 일치하지 않을까?" "각 장르 예술가들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와 같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난 좀 더 공부해야 된다. 나는 이 점을 후련하게 검증하려고 통계학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 서른이 되던 해에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그들과 오랫동안 삶을 같이하며 연구하는 인류학적 참여관찰법을 쓰려고 마음먹었다.
나는 예술 공동체를 살펴보기 위해 벌써 15년 가까이 예술계에 있다. 그리고 내 연구방법론은 내 삶을 바꿔 놓았다. 학자가 아닌 새로운 신분을 얻었다. 만화 '올드 독'에 그려진 이야기인데, 강력계 형사가 용의자를 감시하려고 리어카에서 장사하는 척 잠복근무하다가 그 장사가 대박이 났고, 이에 형사는 '이깟 경찰일'이라고 사표를 던지고 본격적인 장사에 뛰어든다는 허탈한 픽션.
내가 그렇다. 연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뭐가 본업인지 모르게 되었다. 내가 다시 상아탑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뭐든 글쓰기는 즐겁다. 정교한 평론을 쓰는 일, 차가운 논문을 쓰는 일, 뜨거운 대자보를 써 붙이는 일, 이렇게 부드러운 칼럼을 쓰는 일, 뭐가 제일 행복한 글쓰기일까. 종합선물세트 같은 내 삶이 마지막까지 아껴두고픈 초콜릿은 뭘까.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 klaatu84@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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