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切問而近思(절문이근사) -②문턱을 넘다

우리는 노마디즘을 사랑할 뿐, 그것을 이념적 지주로 떠받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노마디즘의 용법을 몸으로, 삶으로 익히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 개의 고원'의 용법, '노마디즘'의 응용일 뿐이다. 뗏목이 되는 순간, 그것조차 놓아버릴 작정이다. 길은 어차피 우리 스스로가 직접 열어야 하는 것이므로.(고미숙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중에서)

책 축제 첫날 저녁 모임. 새롭게 동료가 된 L선생님과 오랜 동료인 P선생님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L선생님이 물었다. "책쓰기 관련 모임이니 국어 선생님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양한 과목의 선생님이 함께하고 있다는 데 놀랐어요. 힘들진 않나요?" 그러자 P선생님이 한마디 했다. "힘들긴 해요. 하지만 재미있어요. 가장 좋은 건요, 잘못 해도 절대로 혼나지 않아요. 그게 좋아요."

듣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혼내는 주체는 아마 나일 터이다. 돌아보니 이따금 화를 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혼낸 적이 없는 건 분명하다. 그 화조차도 대체로 나를 향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진행하는 일마다 감동의 연속이었고, 그 감동을 함께 누렸는데 꾸짖을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더욱이 내가 그들을 꾸짖을 만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나도 그들의 동료일 뿐이니까.

처음 우리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문화 자체에 놀란다. 엄숙하게 지정된 자리에 앉아 일방적으로 지시를 받는 그런 형태가 아니라 언제나 시장바닥처럼 왁자지껄한 풍경을 만든다. 중심도 목표도 없이 개개인의 언어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모임에는 문턱이 없다. 처음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넘어야 할 문턱은 바로 그것이다. 문턱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바로 문턱을 넘는 것이다. 그 문턱이 높다고 생각해 결국 동료가 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대단한 기대를 하고 찾아온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특히 자존심이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견디기가 어렵다. 하지만 몇 번 모임에 참여하다보면 깨닫는다. 시장바닥처럼 왁자지껄하지만 거기에 질서가 있고, 그 문화 속에서 아름다운 아이디어들이 마구 솟아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그들의 자존심이 높다는 것을.

모임의 풍경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2005년, 논술 광풍에 대응하기 위해 대구통합교과논술지원단이 꾸려졌다. 7명의 단출한 모임이었지만 열의는 대단했다. '우리는 대학입시를 위해 모인 모임이 아니다. 교사의 일방적인 주입식 수업을 지양하고 토론과 쓰기를 통해 학생들의 자기주도적인 수업을 유도해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모임이다'라고 천명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토요논술학교에 참가한 고3 아이들은 대학입시를 위한 실질적인 정보를 원했고, 그러다보니 논술수업이 오히려 주입식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겪기도 했다.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구성원들 간의 토론 시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일방적인 지시로 흐르기 시작했다. 가장 답답했던 것은 입시에 초점이 맞추어지다 보니 입시의 변화에 활동의 방향이 결정되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논술 축소 내지 폐지의 바람은 30명 정도로 늘어난 구성원들에게 엄청난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시행착오는 아팠다. '뗏목이 되는 순간, 그것조차 놓아 버려야' 하는데 시행착오를 인정하는 데만 제법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문턱을 넘을 새로운 방향이 필요했다. 그 방향은 두 가지를 전제했다. 하나는 대학입시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대학입시를 능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정책, 구성원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 정책을 만들어가는, 그래서 현장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정책의 수립이 그것이었다. 길은 어차피 우리 스스로가 열어야 했다. 힘든 시간들이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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