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漁港)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표현만큼 통영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말은 없을 듯하다. 통영은 인구 14만 명의 조촐한 어항이지만 이 도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과 예술인을 배출한 대표적인 예향(藝鄕)이기도 하다.
지난달 28일부터 통영에서는 통영국제음악제(TImF)가 열리고 있다. 이 기간에 주공연장인 통영국제음악당뿐만 아니라 통영 시내 곳곳에서 클래식부터 인디음악까지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통영국제음악제는 3일 끝나지만 음악 이외에도 예술도시 통영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기자가 통영을 찾은 지난달 29일은 비가 많이 왔다. 예정대로 진행돼야 할 프린지 공연은 대부분 윤이상기념공원 메모리홀로 옮겨져 진행됐다. 그래서인지 윤이상기념공원의 전시관 건물 안은 비를 피하는 관객과 공연하러 온 출연진들로 복잡했다. 공연을 보는 대신 전시관 2층에 전시된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유품들을 관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시관 2층에는 윤이상이 독일에서 작곡활동을 하던 시절의 유품과 악보, 녹음 테이프 등이 전시돼 있다.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어린 시절부터 독일 생활, 그리고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느꼈던 고통 등이 전시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충무교를 건너 통영국제음악당으로 향한다. 통영국제음악제 개최와 함께 개관한 통영국제음악당은 갈매기를 연상시키는 날개 모양의 지붕만으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 오는 날씨에도 국제음악제 좌석은 대부분 매진됐다. 국제음악당은 콘서트홀과 '블랙박스'라 이름 붙은 두 곳의 공연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모두 음악 연주 공연에 적합하게 설계됐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날이 개면서 통영 시내 곳곳에서는 젊은 음악인들의 연주소리가 넘쳐흘렀다. 강구안 문화마당의 한 카페는 커피를 마시면서 문화마당 무대의 노랫소리를 즐기라고 내부의 음악을 틀지 않았다. 윤이상기념공원 무대에는 통영의 청소년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동피랑에 벽화를 보러 온 관광객들도 동피랑 정상부에 흘러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통영의 강구안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국제음악제 기간 동안 통영 일대는 음악 소리로 들썩거리는 모습이었다.
◆해저터널 오가며 만나는 예술혼
윤이상기념공원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해저터널이 있다. 아시아 최초로 만들어진 이 해저터널은 통영의 육지부와 미륵도를 이어주고 있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의 음악세계를 탐구한 뒤 해저터널을 지나면 김춘수(1992~2004) 시인의 시 세계와 전혁림(1915~2010) 화백의 미술세계가 관광객을 기다린다.
미륵도 쪽으로 해저터널을 빠져나온 뒤 도보로 약 10분 떨어진 곳에 김춘수 시인의 유품전시관이 있다. 이곳에는 시인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생전에 사용하던 식기, 다기, 문구류 등을 전시해 놓았다. 또 시인의 서재와 침실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공간도 있어 생전 집필할 때나 생활할 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다.
김춘수 유품전시관을 나와 용화사 방면으로 약 15분간 올라가면 전혁림 미술관이 나온다. 통영 출신의 화가 전혁림 화백이 평소에 생활하던 봉평동 뒷산 중턱에 지어진 이 미술관은 건물 외벽 타일부터 화가의 작품들로 장식돼 있다. 외벽은 전혁림 화백의 1998년 작품인 '창'(Window)이라는 작품을 재구성해 11종류의 타일 작품을 조합해 만든 가로 10m, 세로 3m의 대형 벽화가 장식돼 있다. 3층으로 구성된 전시관에는 전혁림 화백의 작품과 그림을 그릴 때 쓰던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김춘수 유품전시관에서 전혁림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의 또 다른 볼거리는 바로 벚꽃이다. 비가 왔지만 다행히 다 지지 않은 벚꽃이 전혁림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 벚꽃길은 용화사까지 계속 이어진다. 관광버스가 용화사를 통해 미륵산을 등산하려는 등산객들을 태우고 올라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박경리 묘소에서 보는 한려해상
통영에서 소설가 박경리(1926~2008) 선생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통제영에서 충렬사 방향으로 올라가는 서문고개를 비롯해 통영 시내 곳곳은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요 무대다. 또 통제영지 근처에 박경리 선생의 생가가 있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의 문학세계를 잘 알기 위해서는 산양일주도로를 타고 박경리 선생 묘소 바로 아래 있는 박경리기념관을 가 보는 게 더 좋다.
산양일주도로의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산양읍사무소 방향으로 들어가 작은 길을 자동차로 약 6분 정도 달리면 박경리기념관이 나온다. 박경리기념관에는 박경리 선생의 육필 원고부터 집필실을 재현해 놓은 공간,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대한 작품설명과 소개 패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곳을 들어서면 바닥이 흙에서 돋아나는 새싹을 찍어놓은 사진으로 꾸며져 있어 마치 흙을 밟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문학관에는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남겨놓은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글과 말의 한 토막을 볼 수 있다.
기념관을 나와 산길을 약 5분 정도 올라가면 박경리 선생이 잠들어 있는 묘소가 나온다. 흔한 한자 비석 하나 없이 상석만 놓여 있는 이 묘소를 올라오는 곳곳에 박경리 선생이 쓴 글들이 돌에 새겨져 있었다. 관람객들은 길 초입에 있는 박경리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 '옛날의 그 집'을 보며 상념에 젖기도 했다. 박경리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뒤를 돌아서면 산 사이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잔잔한 바다의 풍경과 멀리 보이는 섬이 환상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박경리 선생의 묘소를 둘러보고 나면 '통영은 예술인이 많이 날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윤이상, 전혁림, 김춘수, 박경리, 유치환 등 통영이 낳은 문인, 예술인의 생가는 바다를 향해 있었다. 드넓은 바다와 사이사이에 떠 있는 섬들을 마주하며 자란 감성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래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의 수공업을 언급하며 그 예술적 기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측했었나 보다.
"바다 빛이 고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노란 유자가 무르익고 타는 듯 붉은 동백꽃이 피는 청명한 기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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