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이 온통 헝클어져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원고 마감시간이 점점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치밀어 오는 슬픔과 분노에 생각은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다. 우리 아이들이 왜! 무엇 때문에! 진도 앞 차가운 바닷물 속, 쇠로 만든 그 캄캄한 방 속에 웅크리고 앉아 외롭고도 아픈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그 칠흑의 공간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채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도 마냥 서럽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건축이라는 것도 사람을 위한 장치이기에 그 어떤 개념도 사람보다 앞에 둘 수가 없다. '세월'의 무게를 안고 우리의 건축은 우리의 도시는 과연 건강하고 투명한가를 힘겹게 반성해본다. 아이들의 꿈을 처절하게 앗아간 어른들의 욕심이 과연 '세월호'에만 얹혀졌을까? '세월호'를 둘러싼 우리 인간의 거센 탐욕이 분명 도시와 건축 곳곳에도 끈질기게 스며들어 있음이리라. 시대의 탐욕이 고스란히 스며든 많은 개발사업, 턴키형식으로 진행된 수많은 대형건축물 그리고 실제적 필요성이 아닌 구호에 의해 지어진 곳곳의 건축 군상들. 용산개발, 4대강,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세빛둥둥섬, 노들섬 오페라하우스 등 계획되거나 실행된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들이 '세월호' 사고에서 나타난 총체적 문제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도시 그리고 그 도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건축이 위정자들의 구호로 만들어져서도 안 되며 탐욕의 자본에 이끌려서는 더더욱 안 되기에, 그리하여 '슬픈 세월'의 무게를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건축은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사람'이 빠진 건축은 '사랑'이 없고 '우리'가 배제된 도시에는 '희망'이 없다. 우리의 도시는 높고 큰 건축물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 가까이 서 있는 작은 하나하나의 건축물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가는 것이다. 건축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본과 완전히 떨어질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과 이웃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함께 고민한다면 암울한 현재를 딛고 보다 희망적인 도시를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 주변에 이름 없이 앉아 그저 묵묵히 사람과 정을 나누고 있는 작은 건축물 하나를 소개하면서 슬픔 위에서 함께 일어설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조그마한 구멍가게 하나 없는 오지 마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20여 호밖에 안 되고 노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 마을 입구에 머리 위로 산을 얹은 채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앉아 있는 작은 건물이 바로 조제리보건소이다. 마을을 진입하면서 보이는 건물은 여느 시골의 집들 마냥, 너무나 익숙하게 주변과 어울리고 있다.
작은 마을보건소는 이웃의 집들과 마찬가지로 경사지붕을 이고 있다. 마을입구의 들판에서 보면 평범한 박공지붕이나 마을 안쪽으로 진입하여 보면 뒤쪽의 경사지붕이 길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건물이 변형된 박공지붕을 가진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음이다. 우선 일반 시골집과 달리 보다 큰 공간을 요구하는 기능적 이유에서이지만 단지 기능적 요구에 의해 경사지붕을 변형시킨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이는 마을주민에게 부여하는 낯선 시각적 경험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주고 싶은 건축가의 의도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지붕재료는 회색의 아연철판을 얹어 세련된 도시 감각을 주는 동시에 주변의 기와지붕과 함께 호흡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얀 외벽 역시 단순하고 정돈된 느낌의 도회적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다소 거친 듯한 친숙한 벽돌로 이루어졌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푸른 들판이 남쪽 창을 통해 가득 밀려들어 오고 가을에는 알알이 영근 누런 벼가 눈앞에서 일렁거린다. 적당히 높은 남쪽과 동쪽 창을 통해 한껏 들어오는 풍부한 햇살과 풍경은 시골 툇마루에 앉아 즐기는 일상과 너무나 닮아 있음에 단순한 보건소를 넘어 고향집처럼 푸근하다. 오지마을의 보건소는 일반적인 보건소와는 분명 달라야 한다. 단지 약 냄새 나는 기능적인 건물로만 서 있는 많은 보건소와 달리 오지마을의 보건소는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정겨운 사랑방이 되어야 함을 조제리보건소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조제리보건소는 마을의 어른들이 그저 몸이 불편해서 오는 그런 건물이 아니라 그냥 오며 가며 무단히 들리는 사랑방 같은 건물이다. 나는 확신한다. 조제리의 눈 덮인 겨울 들판 풍경이 단지 차갑고 쓸쓸하게만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건소 내부 온돌마루에 등을 대고 보는 겨울 풍경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오가는 정겨운 이야기 그리고 그 위로 스며드는 한 줄기 바람처럼 더욱더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하리라. 사람을, 특히 시골마을 노인들의 일상을 최우선으로 배려한 조제리보건소를 통해 우리 도시에 작은 희망의 싹 하나를 틔우고자 한다.
조극래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544-4)
설계: 윤승현 인터커드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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