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 소녀 유관순은 일본의 시각에서 보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다니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제는 전국에 휴교령을 내리고 삼엄한 검문에 나섰다. 청년들은 길거리에 나설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한번 터진 만세운동이 숙질 리 없었다. 감시가 철저한 남자보다 여자들이 연락책으로 나섰다.
휴교령으로 고향 천안에 내려와 있던 유관순도 주변 24개 고을을 규합했다. 그리고 그해 4월 1일 3천여 명이 참가하는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날에만 19명이 숨졌다. 유관순은 일제에 체포돼 극심한 옥고를 치렀다.
지난해 11월 주일한국대사관에서 발견된 문서엔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여사 역시 '3'1 독립운동 만세로 인하야 총살당함'이라 썼다. 이 문서는 유 열사에 대해 '3'1 독립운동 만세로 인하야 왜병에게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당함'이라 기술했다.
유관순은 재판 과정에서도 당당했다. 재판정에서 "일본인은 우리를 심판할 권리가 없다. 죄인으로서 심판받아야 할 것은 일본인들"이라고 진술했다. 일본 오사카 서적이 발행한 소학(우리나라 초등학교 과정) 사회 6학년 교과서에 올라 있는 내용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8종 고교 역사서 가운데 절반에서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기술이 누락돼 논란이 일고 있다. 일각에선 계급투쟁, 민중사관에 물든 좌파들이 지식인 출신에다 기독교인이던 유관순을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으로 몰아 의도적으로 교과서에서 삭제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 문제는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가 '친일 인사들이 유관순을 이화 출신의 영웅으로 만든 것', '북한에서는 유관순을 모른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촉발됐다. 김 교수의 시각은 '좌 편향 교과서의 유관순 배제가 옳다'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문제가 불거지자 김 교수는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했다. 사죄문도 냈다. 아무리 그래도 사죄로 끝내기에는 그 잘못이 깊고 크다.
유관순 열사는 그 자신은 물론 일가족이 일제에 의해 희생됐다. 열사를 친일파의 산물로 몰아 역사에서 지우려는 자체가 친일이다. 일본 교과서에도 실린 내용을 우리 교과서에서 읽을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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