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조건 크게, 튀게? 거리와 어울려야 좋은 간판

길거리의 광고, 요즘 간판

도심 분위기를 바꾼 아기자기한 간판. 닭백숙집과 전당포, 탕제원, 한정식점 등 다양한 상점이 몰려있는 대구
도심 분위기를 바꾼 아기자기한 간판. 닭백숙집과 전당포, 탕제원, 한정식점 등 다양한 상점이 몰려있는 대구 '진골목'은 지난해 골목 분위기와 맞춰 간판을 새롭게 정비했다.
간판 제작 업체인 미림사의 김덕용 대표가 자신이 만든 입식 광고 간판인
간판 제작 업체인 미림사의 김덕용 대표가 자신이 만든 입식 광고 간판인 '락락공방'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핸드폰 똥값, 우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빨간색 바탕의 휴대전화 판매점 간판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다. 하지만 상세한 그림까지 덧붙여 휴대전화가 싸다고 광고하는 이런 원색적인 간판들은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쉽게 마주하는 광고는 '간판'이다. 과거에 붓과 페인트로 일일이 그렸던 간판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LED 등 첨단 소재를 활용해 화려하게 변하고 있다. 또 무조건 크게, 눈에 잘 띄게, 튀게 만든 간판보다 최근에는 도시 경관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간판이 떠오르고 있다.

◆ 30년 경력 간판쟁이, "간판은 종합예술"

이달 21일 찾은 대구 동구의 한 간판 제작 업체. 바닥 여기저기 나뒹구는 목재들로 어지러운 이 공간은 다양한 간판이 탄생하는 곳이다. 간판 업체의 대표인 김덕용(54) 씨는 30년간 '간판쟁이'로 살아왔다. 그는 간판 만드는 일을 밥벌이로 택한 이유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0년 전에 간판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간판이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았어요. 나무 합판 위에 페인트로 글씨를 쓰는 게 전부였지요. 그래서 글씨를 반듯하게 쓰지 못하면 간판쟁이 못했어요." 김 씨는 과거의 간판쟁이들을 '종합예술가'라고 표현했다. 자 하나, 칼 한 자루를 들고 간판을 만들었고, 글씨를 쓰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며, 톱질과 망치질을 해 설치하는 목수 역할까지 감당했다.

간판업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함석판 위에 비닐코팅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광고판 안에 형광등을 넣는 내부 조명 기술도 나왔다. 이후 아크릴 소재를 사용한 입체적인 간판이 등장하면서 나무판에 붓으로 그리던 간판은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김 씨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에는 간판 원단인 '후렉스'라는 합성수지를 많이 사용했고, 수작업 대신 컴퓨터로 도안을 짜는 디지털 프린팅 기술이 상용화됐다. 기술이 발달하니 손글씨로 간판을 만들던 사람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 씨가 간판만 만든 것은 아니다. 아파트 벽면에 줄을 타고 매달려 아파트 이름과 숫자를 그리는 일도 그의 주요 업무였다. 김 씨는 "글씨, 숫자 하나에 크기가 2~3m씩 될 만큼 거대하게 그렸다. 요즘에는 이런 일꾼들도 찾기 힘들고, 아파트 이름이 밤에도 잘 보이도록 LED 조명을 사용해 간판을 만들더라"며 "예전에 내가 작업했던 아파트들은 거의 다 재개발돼서 지금은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간판은 '사각의 틀'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간판 소재로 나무와 LED를 섞어 사용하고, 다양한 모양을 만드는 등 창의적인 간판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 대구옥외광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입식 광고간판인 '락락공방'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는 "간판은 가게와 건물의 얼굴이다. 글씨만 크다고 다 간판이 아니다"며 "가게의 특성을 잘 살린 다양한 간판이 많아져 대구 거리가 더 아름다워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 도심 분위기 바꾸는 간판들

간판의 첫 번째 목적은 노출이다. 하지만 큰 글씨와 자극적인 문구, 강렬한 색상의 간판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는 있어도 보기 좋은 간판은 아니다. 최근 대구 거리 곳곳의 간판이 바뀌고 있다.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마라톤 구간에 포함된 상점의 간판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데 이어 사람들이 자주 찾는 거리를 중심으로 간판이 새 옷을 갈아입고 있다.

대구 근대골목투어 코스로 포함된 '진골목'이 대표적인 사례다. 닭백숙집, 슈퍼마켓, 전당포, 탕제원 등 다양한 상점이 몰려있는 이곳에는 아기자기한 간판이 많다. 중구청은 지난해 종로'진골목 가로환경개선사업을 시행하며 이 일대 간판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탕제원 간판에는 약탕기 모양을 그려넣고, 한정식집은 청사초롱 형태의 작은 돌출 간판으로 각 상점의 특성을 잘 살려냈다. 영진 탕제원 주인인 이미옥(50) 씨는 "원래 우리집은 간판이 없었는데 구청에서 이 사업을 하면서 간판을 만들어 달아줬다. 오시는 분들이 간판이 예쁘다고 칭찬하고, 사진도 찍어간다"고 말했다.

대구시민회관 주변에도 간판 정비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시민회관이 약 3년간 공사 끝에 재개관하면서 주변 상점의 간판 디자인도 새 건물과 어울리도록 정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일대 100개가 넘는 상점의 간판을 정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정부에서는 간판에 원색 사용을 피하고, 작은 글씨를 사용해 작고 예쁜 간판을 달도록 권하지만 업주들이 이를 원치않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간판 디자인 및 제작업체인 사인이넥스의 손덕순 대표는 "업주들은 간판 글씨가 크고, 색상이 화려한 것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정부는 '캘리그라피'처럼 감각적인 작은 글씨를 간판에 사용하라고 권한다면 업주들은 멀리서도 상호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고딕체를 원하기 때문에 두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며 "이 지역은 식당과 노래방, 공업사 등 다양한 업종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각 업종의 특성은 최대한 살리면서 튀지 않게 하는 것이 이번 사업의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글 사진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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