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천 역로를 따라서 교통요지 뿌리찾기] <7>반촌 봉계와 떡전골 주막을 거쳐 추풍령까지

과거시험 통로 즐거운 樂고개…이여송이 맥 끊자 落고개 불려

김천역을 관할하는 김산군의 관아와 향교를 방문하고 평소 존경하던 성리학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의 문학 혼이 서린 배천마을 경렴서당을 돌아본 이중환은 이번 순시의 주 목적지인 추풍령을 향해 출발했다. 김산고을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이자 풍수지리로 볼 때 대표적 명당으로 꼽히는 봉계마을을 거쳐 낙고개와 떡전골 주막, 김시창 정려각, 당마루, 추풍령으로 발걸음을 이어가는 이중환을 따라가 보자.

◆김산고을 대표 반촌 봉계(鳳溪), 봉황부유형의 명당

역리들의 배웅을 받으며 문산역을 출발한 이중환은 김산고을을 대표하는 반촌으로,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봉계(지금의 김천시 봉산면 소재지)를 찾았다. 문산역에서 따라나선 역리는 봉계마을 입구에서 마을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봉계는 인의리(仁義里), 예지리(禮智里), 신리(信里)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유교의 최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즉 오상(五常)에서 따온 것입니다요. 원래 고려 말에 서산 정씨가 먼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는데 뒤에 창녕 조씨와 연일 정씨가 차례로 입향해 집성촌을 형성하고 두 문중에서 많은 인물과 부호를 배출해 김산고을의 대표마을로 발돋움했다고 합니다요. 봉계가 크게 번성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풍수지리로 볼 때 봉황이 물 위에 떠있는 봉황부유형(鳳凰浮游形)의 명당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합지요."

"봉황부유형이라, 마을의 배후에 있는 산 이름이 무엇이더냐?"

"난함산(卵含山)이라고 불립니다요."

"마을의 배후에 있는 주산 이름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다고 난함산(卵含山)이라 불린다면 좌측과 우측 산은 무어라 불리느냐?"

"각기 문암봉과 극락산으로 불립지요."

처족(妻族)이자 당대 최고의 지관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목호룡(睦虎龍)을 통해 여러 풍수 관련 서적을 접했던 이중환이었기에 한눈에 주변 산세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중환은 "난함산이 주산이고 문암봉과 극락산이 좌청룡 우백호, 마을 앞 직지천 너머 덕대산이 안산의 역할을 하고 있구나"라고 중얼거렸다.

다시 말해 봉황이 좌우의 날개를 펼치고 남쪽의 직지천에 앉아있는 형국으로 난함산에서 발원한 봉계천이 직지천으로 흘러들면서 장사례들로 불리는 평야지를 형성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세였던 것이다.

◆성균관 대사성 매계 조위(曺偉)의 생가 율수재(聿修齋)

봉계마을로 들어선 이중환은 절의천 샘물로 목을 축인 후 봉암서당과 분통골 앞을 지나 조선 전기의 유학자로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최초로 언해한 '두시언해'(杜詩諺解)와 유배가사의 효시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한 매계 조위(曺偉)의 생가를 찾았다.

조위는 점필재 김종직의 처남이자 제자이다. 성종 때 고매한 인품과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던 인물로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며 역모로 몰려 부관참시까지 당했다가 1506년 사면되고 불과 10년 전인 1708년(숙종 34) 문장공(文莊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종직과 함께 존경하던 선배 문인이었기에 이중환은 생가터에 마련된 율수재에 들러 향을 올리고 지극한 예를 표했다.

◆입석마을과 낙고개 거쳐 유명한 떡전골 주막으로

봉계마을에서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니 마을 입구에 난데없이 큰 바위 하나가 떡 버티고 섰다.

동행한 역리는 "충청도 황간현과 경상도 김산군을 구분하는 마을로 이 바위가 경계석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요"라고 이중환의 관심에 답한다. 말을 재촉해 용화사를 지나자 고개 하나가 또다시 나타나자 역리는 "이곳이 그 유명한 낙고개"라고 알려준다.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원래 풍수에 조예가 깊었는데 왜병을 추격해 김천까지 왔다가 이 고개에 올라와 보고는 이 고을이 큰 인물을 배출할 명당이라 하며 기(氣)를 끊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요. 이후 사람들은 원래 즐거울 낙(樂) 자의 낙현(樂峴)이었던 이 고개를 떨어질 낙(落) 자로 고쳐 낙현(落峴)으로 고쳐 불렀다고 알려져 있습지요."

역리의 말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에는 이 고갯길을 넘어가면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라 하여 서울로 가는 주 통로로 이용됐는데 이여송이 기를 끊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옆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참으로 고약한 인사로구나." 이중환은 말머리를 돌리며 국력이 약해 명나라의 힘을 빌려 겨우 임진왜란을 수습한 나라의 아픈 현실에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었다.

고개를 내려서니 추풍령과 괘방령으로 갈라지는 평촌마을(지금의 김천시 봉산면 태화리)이 나타나는데 인근 고을에서 가장 큰 주막으로 명성이 자자한 떡전골 주막이 있는 마을이다.

점심을 하기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벌써 행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예부터 서울에 갔던 남쪽 사람들이 추풍령 아래 떡전골 주막에서 몇 월 며칠에 만나자고 하면 누구 할 것 없이 알았다고 할 만큼 유명한 주막입니다요."

◆벼슬살이 안 하고도 시호(諡號) 받은 고도암마을 남정 김시창

갱시기 한 그룻에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친 후 다시 길을 나서니 이제부터는 추풍령을 향해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된다.

대충 5리쯤 걸었을까. 고도암마을 입구에 이르니 평생 관직에 나가본 적도 없는 처사(處士)였음에도 사후(死後)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받은 남정 김시창(金始昌)의 정려각이 이중환을 반긴다.

조선 전기의 선비 김시창은 평생을 향리에서 살면서 학문에만 정진한 처사였는데 성종, 중종, 인종 임금의 국상 시마다 상복을 입고 도성을 향해 3년간 절을 하며 예를 갖추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추천으로 관직이 제수됐으나 끝내 받지 않았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정진하다 86세를 일기로 작고하자 1558년(명종 13) 효절공(孝節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평생 벼슬살이 한 번 한 적도 없는 선비에게 시호가 내려진 보기 드문 사례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교통의 요충지이자 호국의 성지인 추풍령(秋風嶺)

김시창의 정려각에 들러 참배한 후 이내 역마를 몰아 추풍령을 향해 내달렸다. 짧은 늦가을 해가 한참 기울어졌다. 감나무가 많아 이름 붙여졌다는 감나무골을 지나니 추풍령 아래 첫 마을인 죽막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주막에는 기별을 받고 달려나온 추풍역 역장이 술상을 차려두고 신임 찰방 행렬을 맞는다. "임진년 왜란 때 김천역전투에서 패한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 장군이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군사 500명을 모아 추풍령에 진을 칠 때 수하 장수들을 불러모아 작전회의를 했던 곳이 바로 이 주막입니다요."

탁배기 한 잔을 걸친 후 다시 역마에 올라 당마루를 지나니 금방 추풍령 고갯마루에 다다른다.

"연중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 추풍(秋風)이라 불립니다요. 일설에는 남쪽 고을 선비들이 이 고개를 넘어가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과거시험에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어 인근의 괘방령이나 다른 고갯길로 돌아갔다는 말도 있습지요."

"하하하. 별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이중환은 길의 이름에 따라 쉬운 길을 두고 험로로 돌아간다는 추풍역장의 말에 호탕한 웃음으로 답했다.

역장은 "추풍령은 백두대간 소백산맥 중에서 가장 낮은 고갯길로 수레의 왕래가 쉬워 일찍이 영남의 관문으로 중요시되었기에 유사 이래로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격전지였습니다"라고 귀띔했다.

"임진왜란 때 김천을 유린한 왜병이 추풍령에 진을 친 아군을 파상적으로 공격했는데 정기룡(鄭起龍) 장군이 새벽에 인근 마을에서 징발한 황소꼬리에 불을 붙여 적진에 밀어 넣는 전술로 적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습지요. 중과부적으로 끝내 적에게 추풍령을 내주기는 했으나 노도와 같이 도성을 향해 진격하는 적군을 이틀간 막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요."

나라를 위해 싸우다 간 무수한 백성들의 죽음이 켜켜이 쌓인 고갯마루에 선 이중환은 남인과 노론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 나라의 사정이 걱정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공동기획 김천시

도움말=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참고문헌=디지털김천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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