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축옥사 진실은?…『유성룡인가 정철인가』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오항녕 지음/ 너머북스 펴냄.

조선 선조 때인 1589년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발을 시작으로 3년 동안 정여립과 그와 가까웠던 많은 동인들이 희생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다. 기축옥사를 두고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 꾸몄다거나, 당시 추국청 위관을 맡았던 정철이 옥사를 확대했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잇달았다.

그런가 하면 전라도 선비 정여립이 황해도 일대의 세력과 결탁한 대동계가 실재했으므로 반역사건이었다는 견해도 있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처럼 평가가 다른 것은 역사해석이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4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기축옥사에 대한 역사학계의 논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 책 '유성룡인가 정철인가'는 기축옥사 당시의 위관, 범위를 더 좁히면 이발의 노모가 곤장을 맞고 죽을 당시의 위관, 즉 추국청의 수사 책임자가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하는 논쟁이다. 이는 단순히 추국청의 책임자가 유성룡이었느냐, 정철이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당시 위관이 누구였느냐는 기축옥사를 바라보는 시각,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역사논쟁에 대한 판단자료가 될 수 있다. 정철은 서인의 주장이었고, 정여립의 난 때 희생된 이발은 동인의 주장이었다. 따라서 정철이 추국청의 위관이었다면, 보기에 따라 서인이 동인을 치기 위해 당쟁을 벌인 것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을 수 있다. 반대로 당시 동인이었던 유성룡이 위관이었다면, 기축옥사는 당쟁에 따른 숙청이 아니라 모반사건에 대한 조정의 광범위한 국문과 처벌이라는 시각으로 볼 수 있다.

선조 즉위 후 정국을 장악한 사림세력은 1575년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이었으나 이이가 죽고 자신이 대사간이 되자 자신은 율곡과 입장을 달리한다며 동인 편에 들어가 성혼, 박순을 비판했다. 선조가 이것을 불쾌히 여기자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주로 가버렸다.

이후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해 무술을 연마하고 1587년 왜구를 소탕하기도 했다. 대동계의 조직이 황해도까지 진출하자 이들의 동정이 주목받게 되었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졌다. 조정이 체포령을 내렸고, 정여립은 죽도로 피신했다가 자살했다.

정여립과 평소 친분이 깊었던 이발'이길 형제, 백유양, 이급 등이 일당으로 몰려 심문 도중에 죽었고, 이산해, 정인홍 등 동인의 핵심 인물들이 관직에서 밀려났다. 남명 조식의 제자 최영경은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사노비 출신으로 정여립 모반에 가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인물)으로 지목돼 옥사했다.

가혹한 국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동인들은 정철과 그 배후의 서인들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다. 또 기축옥사 당시 지나치게 혹독한 국문에 대해 여론의 비판이 거세자 서인들은 이발의 노모가 죽을 당시 위관은 유성룡이었다고 주장했다. 유성룡은 기축옥사 뒤 남인의 초대 당수가 되었는데, 남인들은 서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비열한 정치 공세를 펼친다며 서인에 대해 원한을 더욱 강하게 갖게 되었다.

이 책은 전주대 오항녕 교수가 역사학자 이덕일 소장과 2009년 논쟁을 계기로,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주장과 오항녕 교수의 연구 등을 묶은 것이다.

지은이 오항녕 교수는 "(역사학자 이덕일 소장과) 2009년 논쟁은 뜻밖의 과제를 안겨주었다. 내가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은 것은 선조 24년(유성룡이 위관이었던 시절)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생각했던 것을, 이덕일은 선조 23년(정철이 위관이었던 시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잘못 알았다는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려 400년 동안 지속되어온 미묘하게 뒤틀린 기억이 배경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기록과 기억의 변주가 보여주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기축옥사'라는 하나의 실체를 두고 어떤 이는 당쟁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보고, 어떤 이는 왕조시대에 발생한 반역 사건으로 보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축옥사 당시 위관이 서인의 주장 정철이었기에 이발을 비롯한 동인을 무참히 처형했던 것일까. 아니면 동인이었던 유성룡이 위관을 맡았음에도 추국청이라는 공간, 국왕이 반역 사건을 직접 다스리는 추국청이라는 제도의 살벌함이 이발의 80세 노모와 10세가 안 된 어린 자식도 구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일까?

지은이는 어쩌면 정철이나 유성룡이 위관이었다는 사실보다 추국청 자체가 더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임금이 반역죄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제도, 임금의 뜻에 반할 수 없는 제도적 공간, 그 공간은 시대의 산물이자 권력자의 불가침 영역이다. 따라서 정철이나 유성룡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은이 오항녕은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이 국문을 받다가 죽을 당시 추국청 위관은 유성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지은이가 하고 싶은 말은 위관이 누구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은 무엇일까, 무엇이 기축옥사의 핵심일까, 더 나아가 기축옥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로 귀착한다. 어느 한 쪽이 진실이라면 '진실이 아닌 쪽을 믿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 기억의 변주 혹은 조작에 빠지는 것일까'라고 묻는 것이다. 286쪽, 1만7천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