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나의 대통령에게 듣고 싶은 말

1982년 전북 익산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1982년 전북 익산생. 서강대 언론대학원 재학(미디어교육 전공). 2007년 MBN 입사

'호흡기로 감염' '감염 속도 초당 3.4명' '치사율 100%'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덮친다. 사망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시민들은 무방비 상태로 바이러스에 노출된다. 정부는 2차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 재난 사태를 발령하고, 급기야 도시 폐쇄라는 초유의 결정을 내린다.

놀라지 마시라. 현실이 아닌, 2013년 허구로 만들어진 영화 '감기'의 내용이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보고 영화 '감기'를 떠올리며 데자뷔(처음 보는데 이전에 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를 보는 것 같다는 사람들이 많다. 초동 대처 실패로 급속도로 늘어나는 감염자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격리되는 시설들, 그 속에서 자라나는 불안과 공포, 괴담과 음모들…. 치사율과 사망자 수만 다를 뿐 사태의 심각성과 문제점들은 지금의 '메르스 정국'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메르스 발생 초기, 양병국 질병관리본부장은 "감시 체계가 정확하게 작동돼서 통제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도 "개미 한 마리 못 지나가게 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안심하라던 보건 당국의 말과는 달리 '메르스' 감염 환자는 급격하게 늘어났고 국민들은 불안을 넘어 이제 공포에 떨고 있다. 위기 상황 발생 시, 그동안 정부는 불리한 정보는 숨겼고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정보는 과장해 발표했다가 뒤늦게 사과하기 일쑤였다. 더 이상 나라를 믿지 못하는 마음은 각종 소문과 유언비어들로 나타났고 괴담으로 퍼져 나갔다.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도 괴담들이 난무하자 정부는 괴담이 사회에 혼란을 야기한다며 유포자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처벌 근거도 없고, 실체도 없는 그림자를 찾아내겠다며 메르스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괴담 탓으로 돌리고 있다. 괴담이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능한 대처로 혼란해진 사회가 괴담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정부는 왜 모르는지 참 한심한 노릇이다.

지난 3일, 우려했던 메르스 3차 감염자가 발생하고, 5일 현재 사망자가 4명으로 늘면서 국가에 비상이 걸렸다. 3일 자 각종 조간신문엔 국가 재난 상황을 알리는 무서운 제목들이 굵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공포가 엄습해 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래 기사엔 대한민국의 수장인 박근혜 대통령의 웃는 사진이 실렸다. 전염병 창궐이라는 국가 비상 상황이 닥쳤는데도 박 대통령은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전남 여수까지 내려가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에 참석한 것이다. 이날 아침 신문을 받아 든 국민들은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청와대는 아찔했어야 한다.

1일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메르스 감염 환자가 발견된 지 12일 만에 처음으로 메르스에 대해 언급했다. "초기 대응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 발언 전체를 뒤져봐도 책임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발언자가 누구인지 모르면 일반 평론가나 언론이 비판한 것인가 느낄 정도다. 박 대통령 특유의 유체 이탈 화법으로 "보건 역량을 총동원하라"는 지시만 있었다. 심지어 이미 3시간 전에 확정된 감염자 숫자도 틀리게 발표했다. 언론의 지적이 나오자 청와대는 부랴부랴 박 대통령 모두 발언 동영상을 편집하느라 진땀을 뺐다.

박근혜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은 세월호 참사 때 이미 바닥을 다 보여줬다. 이번에도 골든타임은 놓쳤지만 지금이야말로 국민을 보듬는 따뜻한 대통령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때이다. '메르스'보다 무서운 '메르스 공포증'을 먼저 물리치기 위해선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직접 방진복을 입고 현장을 방문해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고 국민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줘야 한다.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내가 집니다." "정부는 국민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화 '감기'에서 대통령 역을 맡은 차인표 씨의 대사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잊을 수 없는 명대사다. 이 한마디가 귓전에 맴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대통령에게 직접 듣고 싶다.

이정미/MBN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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