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우는…성탄절과 연말, 감동 혹은 잔혹사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숱한 변주를 통해 우리 곁에 찾아오는 영감님이 한 분 있다.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가 쓴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구두쇠 에브니저 스크루지이다. 소설 속 그는 인정없는 수전노다. 평생 살면서 돈밖에 모르고 남들에게 호의를 먼저 베푼 적이 없다. 그 때문에 돈은 많이 벌었지만, 크리스마스에 이웃 누구에게도 초대를 받지 못한다. 이런 그에게 크리스마스 이브 날 동업자 말리의 유령이 찾아온다. 유령을 통해 스크루지는 자신의 과거'현재'미래의 모습을 보고 인간다운 마음을 되찾는다. 소설 말미에 스크루지가 이웃을 향해 먼저 웃어 보일 줄 알고, 이웃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준다.

찰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통해 그리고자 했던 바야 어찌 됐든 이 소설은 분명히 감동을 안겨준다. 어쩌면 우리는 디킨스의 소설 속 기적과 같은 감동이 현실에도 있길 바라는 마음에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감동사

◆우리 가족 크리스마스 선물 - 김수란(30)

2013년 이후 매년 크리스마스는 나와 남편, 우리 가족 모두에게 특별한 날이다. 우리 첫째 우빈이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25일 오전 3시 45분쯤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린 복통이 밀려들었다. 오전 4시 30분 규칙적으로 오는 진통에 나는 출산이 임박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25일은 휴일인지라 휴일 병원 진료시간을 확인하고 문 열기를 기다렸다가 집을 나섰다. 오전 9시가 살포시 넘어 병원에 당도했다. 병원에 왔다는 안도감에서였을까 아니면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그전까지만 해도 참을 만했던 진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옆에 앉아 내 손을 잡고 있던 남편의 손과 팔, 팔뚝, 가슴 등을 다시는 그보다 더 강하게 힘을 줄 수 없을 정도로 꽉 부여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 미칠 것 같은 고통이었지만 난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힘을 주고, 주고, 또 줬다. 마지막 두 번의 힘주기 끝에 나는 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출산 후 처치를 하는 동안 나는 펑펑 울었다. 처음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컸던 고통에 아파서 울었고, 그다음은 아들이 무사하게 태어났다는 안도감에서 울었다. 그러고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던 이유는 '나를 낳을 때도 이런 고통이었겠구나!'라는 친정엄마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서였고, 마지막 울음은 '내가 드디어 엄마가 됐구나!'라는 묘한 감정에 복받쳐 흐느낀 것이었으리라.

간호사가 내 팔목을 주무르며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 목소리에 안쓰러움, 대견함 등이 묻어 나왔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오전 9시 30분이 넘어 침대에 올라서고 우빈이가 태어날 때까지 짧다면 짧은 2시간 이내의 시간을 지금도 떠올리면 아찔하다. 어떻게 내가 출산의 과정을 다 겪었을까.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다.

이렇게 우빈이는 우리 곁에 다가왔다. 짧은 시간 잊지 못할 강력한 기억을 엄마, 아빠에게 아로새기며…. 우빈아. 엄마, 아빠 곁에 건강하게 와 줘서 너무 고맙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녀의 눈물 - 김민환(32) 씨

대학 시절 나는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계를 꾸렸었다. 그 와중에 사귀게 된 여자친구. 그와 함께 맞는 첫 크리스마스에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는커녕 선물 하나 사기도 어려웠다.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여자친구와의 약속으로 집 밖을 나섰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내 수중에는 고작 2만~3만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돈으로 무얼 해야 하나'라는 걱정밖에 없는 내게 여자친구는 "오늘은 밖에 나가면 사람 많으니까 집에서 밥 먹고 놀자"라고 했다. 그전부터 여자친구는 크리스마스 때 하고 싶은 게 많다며 자신의 로망을 이야기 했었다. 그 가운데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가난한 내 사정을 배려한 것이다.

나는 그런 여자친구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여자친구에게 "집 안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밀 장식품과 함께 먹을 음식재료 등을 사서 집에서 만나자"고 말하고는 급하게 마트로 달려갔다. 내가 준비한 건 아로마 향초, 작은 케이크, 장미 한 송이 그리고 집에서 함께 만들 케이크를 위한 케이크 시트, 생크림, 초콜릿이었다. 여자친구가 도착하기 전에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향초를 하트 모양으로 배치하고 그 안에 케이크를 놓아 마무리했다. 짧은 손편지도 준비했다. 그리고 여자친구가 집에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꽃을 주며 "나 때문에 크리스마스날 집에 있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런 나에게 여자친구는 오히려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라며 고마움의 눈물을 보였다. 그 눈물이 그리고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고 괜스레 내가 더 미안해졌다.

그 후 우리는 내가 사온 케이크 시트에 생크림과 초콜릿을 녹여 케이크를 만들고, 여자친구가 사온 재료로 스파게티를 해 먹으며 시간을 채워갔다. 나에게는 이날 집에서 보낸 크리스마스가 이후 밖에서 인파에 치이며 보낸 크리스마스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기적 같은 크리스마스를 원한다면 - 정모(24) 씨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는 2013년 5월 군 제대 후 이듬해 복학할 때까지 대구 부모님 댁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올 때쯤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재미있는 거 있는데 같이 할래?"라는 제안을 받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구청년센터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저소득 가정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몰래 산타'를 함께 해보자는 것이었다. 자원봉사의 일종인 몰래 산타는 24일 하루 동안 저소득 가정 4, 5곳을 방문해 풍선아트나 마술 등을 선보이고 선물을 건네며 분위기를 띄운다. 그리고 아이들 몰래 숨어 있던 산타가 마지막에 '깜짝 선물'로 등장해 기쁨을 배가하는 일을 한다. 나는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2013, 2014년 두 해 연속으로 몰래 산타가 되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때 세 번째 차례인 가정에 방문했을 때였다. 그 집에는 3남매가 있었다. 막내는 나이가 6, 7세 정도였는데, 몸이 다소 불편한 아이였다. 함께 방문한 우리 조원 7명이 한데 둘러앉아 있는데 막내가 와서 조원 모두에게 뽀뽀를 해줬다. 방문한 가정의 아이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 우리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분위기를 띄우는데 애먹는다. 그런데 이 아이는 너무 밝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줬다. 그래서 마음 편히 풍선으로 장난감을 만들고, 페이스페인팅을 하면서 3남매와 놀아줄 수 있었다. 마지막에 산타 역을 맡은 조원이 막내가 한 해 동안 한 착한 일을 칭찬하며 선물을 안겨줄 때 봤던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창틈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에도 옷깃을 여며야 했던 날, 방문할 집을 찾아 밤새 골목을 헤매노라면 이 일이 수월치만은 않다. 하지만 이 고된 일이 행복한 건 아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을 선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수 남친의 취업 성공기 - 배모(31) 씨

이 이야기는 대학교 때 사귄 전 남자친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대학 새내기. 3학년 때까지 내내 장학생이었던 이 남자, 4학년이 되더니 갑자기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장학금은 고사하고 듣는 수업마다 겨우 낙제를 면하는 정도였다. 다들 취업 준비하느라 바쁜데 그는 자신이 새내기인 양 연일 술만 마셔댔다. 걱정돼 좋은 말로 달래도 보고, 따끔하게 혼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공부하고 취업하는 기계적인 삶을 살기 싫어"라는 그의 궤변은 듣기에 정말 한심할 정도였다. 결국 그는 4년제 대학을 5학년까지 다니고서야 겨우 졸업했다. 졸업 후 백수가 된 건 두말할 나위 없었다.

백수가 된 남자친구는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싶었는지 매일 아침 알아서 도서관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취업이 만만치 않았다. 그해 상'하반기 합해 50군데 정도 지원했는데 서류 지원하는 족족 낙방했다. 가뭄에 콩 나듯 겨우 서류 통과라도 하면 필기시험에서 미끄러졌다. 그때까지 한 번도 마음 약한 소릴 한 적 없는 사람이었는데 TV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가수 더 원이 부른 노래 '비상'을 듣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더 아팠다.

2013년 11월 말. 남자친구는 그해 마지막일지 모를 공채에 원서를 냈다. 어차피 안 될 거 그냥 한 군데라도 더 써본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 서류 전형 합격, 필기도 합격. 12월 중순 회사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 있는 일이라 우리 둘 다 무척 신났었다. 게다가 그는 이 회사 전형은 아예 준비도 하지 않았기에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이후에 더 놀랄 일이 벌어졌다. 면접 전형이 끝나고 며칠 후 남자친구는 최종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또다시 받았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최종면접이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다. 결국 이 남자 그해 연말 최종합격 통보를 받았다. 처음으로 면접 전형까지 가본 회사에 덜컥 합격한 거다. 아직도 기억난다. 입사 수속을 위해 건강검진 받으러 가던 날 그의 상기된 표정이.

지금도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하느라 고생하는 청춘들. 힘내세요. '저거 인간 되겠나?' 싶던 그 사람도 해냈으니 여러분도 다 잘 되실 거예요.

◇잔혹사

연말연시라고 온 세상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징글벨, 징글벨' 맑게 울리는 캐럴 소리도 누군가에게는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드는 징글징글한 소음이 될 수도 있고,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수놓은 아름다운 조경용 루미나리에 불빛도 누군가에게는 연말의 슬픔을 되새기게 하는 섬광일 수도 있다. 그렇다. 연말연시라고 온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고 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고 누가 그랬다. 하여, 앞면까지 기쁨도 나누었으니 이번엔 슬픔도 좀 나눠보자는 의미에서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우울하게 보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참으로 밝히기 힘들었을 텐데 시원하게 툭 털어놓아 준 이들에게 올해도 제야의 종은 동성인 친구와 본 뒤 술이나 먹으러 갈 기자는 감사할 따름이다.

◆이별을 통보받은 첫 휴가-김관영(30) 씨

2007년 12월 23일, 나는 첫 휴가를 나왔다. 휴가 신고를 마치자마자 동대구역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면서 KTX의 광고마저 재미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만큼 사회에서 느끼는 '자유의 공기'는 맛있었다. 특히 사귄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여자 친구를 사회에 남겨두고 입대한 터라, 그녀를 크리스마스이브에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었다.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께 인사드린 다음, 입대 때 정지해놓은 휴대전화를 풀어 애인에게 연락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고 남겨놓은 문자에도 답은 없었다. '계절학기라 바쁜가 보다' 생각했다. 밥을 먹고, 책을 보고, 컴퓨터를 좀 하다가 조바심이 날 무렵에 '헤어지자'는 문자가 왔다. 생애 첫 애인이었고, 군 생활 동안 부모님만큼이나 정신적으로 의지할 대상으로 생각했던 애인이기에 하늘이 무너진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자주 연락했던 친구들은 모두 군대에 있었고 교우 관계가 넓지 않은 나 같은 인간에게는 하다못해 전화해서 술 한 잔 하자고 할 친구도 없었다. 결국 남은 휴가는 집에만 조용히 있었다.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군대에 멈춰 있는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저 앞으로 달려가 버린 세상이 무서웠다. 2007년 12월 25일이 되어 다시 부대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내 기분과는 아무 상관없이 아직도 남아있는 크리스마스의 흥겨운 분위기가 참으로 야속했던 기억이 난다. 뒤로 물러설 수는 없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군 입대 직후의 가장 암울하고 어려웠던 크리스마스였다.

◆회사가 발목 잡은 연말-이모(30) 씨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는 내 인생 최악의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라는 사실은 내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불행한 일이 이렇게 겹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올해 연말은 너무나도 우울하다.

불황이 지속되는 요즘, 회사는 '구조조정'의 태풍이 불고 있다. 모두들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결국 나를 포함해 전전긍긍하던 무리는 "에잇, 모르겠다. 때려치우자!"고 결의, 사표를 쓰기로 했다. 시원하게 사표를 던진 이달 초, 사표를 던지고서야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목구멍 포도청론'을 주장하며 "그래도 어쩌냐, 어떻게든 살아남아 봐야지"라며 버티기로 했었다는 걸. 그리고 '때려치우자'고 도원결의한 무리 중 사표를 던진 인간은 나 혼자뿐이었다는 걸 말이다. 사표를 던지고 나니 회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정한 퇴사일 전까지는 나와야 월차가 돈으로 나와. 그러니 괜히 월차 쓰지 말고 퇴사일 전까지는 나와서 일 좀 해줘." 그 퇴사일이 크리스마스날이다, 이 회사야!

이왕 던진 사표, 시원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 내 날개를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그전에 5년 동안 피와 땀을 흘린 내 노력에 대한 선물은 있어야겠다 싶어 유럽여행을 계획했다. 어찌어찌 비행기와 숙소 예약까지 완료한 그 순간, 이력서를 낸 한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면접 날짜가 잡혔습니다. ○○일까지 회사로 와 주세요." 이게 웬걸, 여행을 떠나려는 그날이 면접날이었다. 아까운 비행기 티켓…, 아까운 내 여행 일정…. 일하느라 만나던 남자 친구와도 얼마 전 헤어졌고, 회사는 끝까지 내 등골에 빨대를 꽂으려 하고, 나를 위해 준 포상도 이직 일정 때문에 못 챙겨 먹은 올해 연말은 정말이지 내 인생 최악의 연말이 될 게 분명하다.

◆고깃집에서 서러웠던 연말-남혜정(29) 씨

지난해 이맘때쯤, 나는 백수였다.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면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정말 싱싱한 날백수였다. 가족을 떠나 서울에 온 이상, 서울에서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버티려면 입에 풀칠해야 했기에 급히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찾아간 곳은 서울 명동의 외국인이 많이 찾는다는 한 고깃집이었다. 나는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열심히 홀 서빙을 했다. 음식을 나르고 치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집에 돌아오면 옷에 잔뜩 배어 있는 음식 냄새에 괴로웠고, 심지어 무좀까지 걸리고야 말았다. 하루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리느라 몸이 지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다 성탄절이 다가왔다. 늘 그랬듯이 내가 일하던 식당은 성탄절을 즐기기 위해 한국에 온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하하 호호 웃는 그들을 보다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사람들은 저리 즐거운데 나만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러다가 내 인생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아르바이트 인생으로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갑자기 우울해졌다. 일하다가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꾹 참고 일을 했다. 일이 끝나고 받은 월급봉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얇았다. 하루종일 고생해서 받은 내 노동력의 대가가 이토록 얄팍하다는 생각에 좌절감은 더 컸다.

다행히 지금은 한 IT 기업에 정규직으로 입사해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지난해 힘들었던 겨울을 버티고 나니 올해 겨울은 그래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됐다. 한동안 지난해 겨울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겨울로 기억될 듯싶다.

◆올해는 홀로 크리스마스-방기원(25) 씨

지난해 9월, 1년 조금 넘게 교제하던 사람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다 잠시 휴학하는 동안 만나 참 많은 사랑을 주고받았던 그녀는 서로 떨어져 지낸 지 딱 한 달 만에 "더 좋은 사람이 생겼다"며, "나를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싶어 이별 1주일 만에 중간 방학을 이용해 한국으로 날아갔지만, 귀국 당일 단 10분만 얼굴을 허락한 그녀는 다음 날부터 '더 좋은 남자'와 교제를 시작하고 더 이상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헤어지고 나서는 그해 가을 내내 매일같이 울다 못해 지쳐서 담배만 피우다 보니 연말이 찾아왔다. 집에 돌아가서도 슬픔이 전혀 지워지지 않아 일어나면 멍하니 산만 쳐다보고, 밥을 먹고 나서는 방에 틀어박혀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고 게임만 하는 나날을 보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어머니께서 해주신 맛있는 음식도, 섣달 그믐날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도 완벽한 위로가 되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머니께서 "기원이가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충격이 컸는지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같이 있는 게 왜 이리 어색하기만 한지…."라고 친구 분과 나누신 메신저 대화를 읽었을 때 난 가슴 한쪽이 더욱 미어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올해 나는 참 오랜만에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홀로 보낼 것이다. 나를 매정하게 떨어뜨렸던 그 사람은 여전히 나 대신 선택한 사람과 예쁘게 만나고 있다고 하더라. 다만, 지난 연말에는 나 혼자서 너무 슬픈 나머지 어떤 주변도 되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던 모습 때문에 많은 사람의 우려를 샀던 만큼, 2015년 남은 2주일은 홀로 떠나는 여행을 충분히 즐기며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날 보며 충분히 마음을 놓으실 테니까 말이다.

◆좋은 일 해주고 싶었지만-이모(32) 씨

10년 전 일이다. 서울에 있는 친구 어머니가 심장에 이상이 생겨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로 어린 나이인지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다가 "혹시 헌혈증이 도움되겠니?"라고 물어봤다. 친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라도 해주면 고맙지"라고 대답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2'28기념중앙공원에 있는 헌혈의 집으로 향했다. 헌혈을 하려는 내 또래의 청년들이 많았다. 내 차례가 됐을 때 나는 편안히 침대에 누워 헌혈을 시작했다. 혈관을 찾아 주삿바늘을 꽂았고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간호사가 달려오더니 내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과, 연결관, 그리고 아래에 있는 혈액 주머니 등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사과를 했다. "지금 주삿바늘을 잘못 찔러서 헌혈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팔뚝이 남자 팔뚝치고는 혈관이 잘 안 보이는 팔뚝인데다 간호사가 초보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혈관이 아닌 다른 곳에 주삿바늘을 찔러버린 것이다.

결국 친구에게 헌혈증을 주지도 못하고,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피는 피대로 뽑힌 채 쓸쓸히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 날 주삿바늘을 꽂은 팔뚝 근처는 누가 때린 것처럼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그 팔뚝을 본 가족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라며 놀랄 따름이었다. 다행히 친구 어머니는 수술을 잘 받아 건강을 회복하셨다.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때 시퍼렇게 멍든 팔뚝의 모습과 직접 도와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함께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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