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청미래덩굴 잎사귀로 싸서

바삭거리는 햇빛 속을 제아무리 빨리 통과했다고 해도 얼굴은 이미 달아오르고 수분을 죄다 빼앗긴 탓인지 눈 밑에서부터 조여드는 느낌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집에서 가깝다는 핑계로 스킨로션 하나 바르지 않고 목욕탕을 빠져나온 것을 잠깐 후회했지만, 하필 이런 날은 엘리베이터까지 어느 층에 붙박여 빨리 내려오지 않아서 애를 태운다. 밀대로 복도 바닥을 닦던 경비실 아저씨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좀 전에 23층으로 마지막 이삿짐이 올라갔으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며 묻지도 않은 답을 건네준다.

'한 달 가까이 쿵쾅거리며 리모델링을 하던 바로 그 집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공연스레 바삭 마른 피부가 더 조여드는 기분이다. 이즈음 벽을 타고 들려오던 이상한 기계음들의 불협화음이며 미세먼지의 두려움까지 보태준 그 댁이 드디어 이사를 왔나 보다. 하지만, 공동주택에 거주하는 이상 누구도 이런 불편함을 피해갈 수는 없어서 서로 조금씩 배려하고 이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이어지는 산불 소식은 안타깝고, 초여름 이상기온으로 몸도 마음도 금세 지치는지, 책 한 권 들고 시작된 독서가 느닷없는 초인종 소리에 깨어보니 낮잠으로 변해 있었다. 토요일 오후 시간이라 우편배달은 분명히 아닌데 누구일까? 인터폰 확인 결과 23층으로 이사 왔다는 예쁜 여학생, 분명한 자기소개를 듣고 그제야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 작은 떡 상자를 전하며 미소까지 얹어주는 학생의 예의 바른 태도에 잠시 어수선했던 마음이 금방 환해졌다.

10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온 그 여름날에도 팥 시루떡을 집집이 돌리면서 어쩌면 유별나게 보이지 않을까 망설였던 기억이 잠시 오버랩(overlap)되었다. 그 이후로는 이제껏 처음 받아 본 떡이고 차츰 사라져가는 풍습 가운데 만난 광경이라 더욱 반가웠다. 종이 박스 안에 얌전하게 줄을 세운 7개의 망개떡, 적당한 크기로 반질반질 청미래덩굴 잎사귀에 싸인 떡, 시루떡처럼 팥고물을 흘릴 염려도 없지만, 팥의 제 역할은 충분히 하는 떡, 얼굴도 모르는 그 집주인의 센스가 돋보이는 선택이었다. 망개는 청미래덩굴의 경남 지방 방언인데 어린잎을 따다가 나물로 먹기도 하고, 다 펼쳐진 잎으로 떡을 싸서 찌면 서로 달라붙지 않고, 고온의 날씨에도 망개잎의 천연 방부제 성분 때문에 오랫동안 쉬지 않으며, 잎의 향기가 떡에 배어 독특한 맛이 난다. 이제는 잘 들을 수 없는 소리지만 한동안 골목길이나 시골 장터에서 일정한 운율에 맞춰 흔히 듣던 떡장수의 '망개~ 떠억' 하는 외침이 문득 그립다.

나를 먼저 열지 않고 상대가 열어주기를 바랄 순 없다. 이웃끼리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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