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하빈의 시와 함께] 많은 물

# 많은 물

이규리(1955~ )

비가 차창을 뚫어버릴 듯 퍼붓는다

윈도브러시가 바삐 빗물을 밀어낸다

밀어낸 자리를 다시 밀고 오는 울음

저녁 때쯤 길이 퉁퉁 불어 있겠다

차 안에 앉아서 비가 따닥따닥 떨어질 때마다

젖고, 아프고,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삶에 물기를 원했지만 이토록

많은 물은 아니었다

윈도브러시는 물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고

있으므로

그 물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저렇게 밀려났던 아우성

그리고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 사람

이따금 이렇게 퍼붓듯 비 오실 때

남아서 남아서

막무가내가 된다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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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뒤에 찾아오는 막무가내의 슬픔을 빗물에 투영시킨, 비 오는 날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수채화다. 시적 화자는 차 안에 앉아 따닥따닥 떨어지는 빗소리에 마냥 아프게 젖는다.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라는 역설적 상황에서 이별의 슬픔은 더욱 고조된다.

차창에 퍼붓는 빗물을 밀어내는 '윈도브러시'가 이별의 주체-나의 상징이라면, 밀고 오는 울음으로, 밀려나는 아우성으로 변주되고 있는 '빗물'은 이별의 객체-너의 상징이다. '윈도브러시'가 '빗물'을 애써 밀어내지만, 밀어낸 자리에 다시 빗물이 차고 넘친다. 밀어낸다고 밀려나는 게 아니며, 떠나보낸다고 떠나가는 게 아니다. 무릇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사코 밀어내던 사랑의 기억 저편 "아직 건너오지 못한 한 사람"을 애틋하게 기다리는 중이다. 퍼붓는 빗속에 남긴, 이 막무가내의 기다림! 울음이 그치는 저녁 때쯤 퉁퉁 불어난 길로 자박자박 옛사랑을 마중 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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