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화합형 정치인

숙종 2년(1675년)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다. 1년 전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한 뒤 생존해 있던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둘러싼 2차 예송 논쟁에서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준 탓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막강한 힘에 눌려 있던 현종은 2차 예송 논쟁을 계기로 정권을 남인에게 넘겨줄 결심을 한다. 첫 단계로 대공설(상복을 9개월 동안 입자는 주장)을 지지한 서인 소장파들을 줄줄이 귀양을 보냈다. 이어 기년설(상복을 1년 동안 입자는 주장)을 주장한 남인 허목을 영의정으로 전격 발탁했다. 허목은 4년 전 처음 영의정에 올랐으나 송시열의 논척으로 물러난 전력이 있었다.

현종 급사 후 왕위에 오른 숙종은 서인 숙청에 더욱 열을 올린다. 남인의 칼날은 송시열의 목을 겨냥한다. 허목, 윤휴 등 남인 중진까지 나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한다. 숙종은 즉위 4개월 만인 1675년 1월 송시열의 귀양을 명한다. 송시열의 나이 만 67세였다.

귀양지를 두고 조정은 논란을 거듭했다. 함경도 덕원에서 충청도 웅천으로, 다시 경상도 장기로 바뀐다. 풍토병이 없던 장기로 정해진 배경에는 남인 강경파와 거리를 둔 허적의 힘이 컸다. 유배 중인 송시열에 대한 고묘론(종묘에 송시열의 죄를 고하자는 주장)이 불거졌을 때도 허적은 반대 입장을 유지했다. 고묘는 역적을 의미했다.

남인이면서도 서인들과 교류가 잦았던 허목도 남인 강경파와 달리 온건한 목소리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정치 보복은 또 다른 정치 보복을 부른다는 판단에서였다. 정권을 잡은 남인은 서인 처리 문제를 두고 줄곧 마찰을 빚었다.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었다. 온건파인 탁남(濁南)의 영수였던 허적은 강경파의 탄핵을 받는다. 탄핵을 받은 허적은 벼슬을 내놓고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충주로 떠난다. 숙종은 밀지를 보내 "과인의 잠자리와 먹는 것이 편하지 못해 병을 얻은 것 같다"며 돌아올 것을 종용했지만 끝내 사양했다.

숙종이 청남(淸南)인 강경파를 내쫓은 뒤에야 허적은 서울로 돌아왔다. 숙종이 강경파의 손을 들어줬으면 송시열은 불귀의 객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온건파의 승리로 평했다.(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적폐 청산이 화두가 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핵심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모두 그 대상이다. 문제는 적폐 청산과 정치 보복의 경계선이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 정권은 적폐 청산이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치 보복의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경우도 적잖다. 선의의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도 크다. 야당의 반발은 문재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 속에 공허한 외침에 그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가슴에 새기며 정권의 실정만을 기다리는 형국이다.

무한한 권력은 없다. 언젠가는 상대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돼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종전 선언, 평화협정 체결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6'25전쟁 당시 남북을 합쳐 200만 명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대와도 분단 극복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과거의 책임은 뒤로 돌리고 있다.

더 이상 정치 보복 논란은 없어져야 한다. 또 다른 정치 보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같은 보기 드문 화합형 정치인은 뜻을 펴기도 전에 꺾였다. 허적과 같은 화합형 정치인이 다시 나올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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