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적일많버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공동대표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권은태 (사)대구콘텐츠 플랫폼 이사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의 줄임말

최근 '워라밸' 시대의 덕담으로 등장

이걸 상대에 말할 때 부끄럽지 않고

들어도 불쾌하지 않다면 그게 잘못

지금도 생생하다.

그분은 강렬했고 광고주는 집요했으며 TV와 라디오는 끊임없이 나르고 또 퍼뜨렸다. 그 덕에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를 하루도 빠짐없이 보거나 들어야 했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도 뇌리에 박힌 듯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다.

그때, 그분은 빨간 옷을 입고 입가에 두 손을 모아 "여러부~운"하고 우리를 불렀다. 그런 다음 주목하지 않거나 못 들은 척 뻗대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한 번 더 "여러부~운"을 외쳤다. 그리고 예쁘면서도 힘찬 목소리로 "모두 부~자 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부~자'의 '부'에 세게 악센트를 준 이 한마디로 광고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사람들은 상대가 누구든 '부자 되시라'는 말을 덕담처럼 거리낌 없이 쓰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인사법 '부자 되세요'는 그때, 그렇게 생겨났다.

새해 인사, 세시풍속도 덩달아 변화를 맞았다. 흔히 쓰는 인사말 메뉴에 '돈 많이 버시라'가 올랐고 변명이나 핑계가 될 만한 피치 못할 사정에도 '돈 벌려다 보니'와 '먹고살려다 보니'가 잘 먹히는 순서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대세가 대세인지라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그런 현상들이 달갑지 않았다. '행복하세요'나 '건강하세요'가 '부자 되세요'에 밀려나는 것도 싫었고 무엇보다 애타도록 부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자꾸 부자가 되라며 강요하는 것 같아 더 싫었다.

물론 자본이 본위인 세상에서 '돈'이라는 게 마트에서 물건 살 때만 필요한 정도의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초기에 늘어나는 재산으로 신의 은총을 확인했던 것처럼 돈은 한 사람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그 사람의 가치까지 수치로 환산해 보여주고 확인시켜준다.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고 그래야 사람 대접도 받는다는 통설도 무척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심지어 돈이 없어 사랑을 못한다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니 이래저래 돈의 힘은 크고 세다. 그리고 그만큼 모두의 삶에 절대적, 또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뻔한 레퍼토리 같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돈이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절대적'을 넘어 '절대가치'가 될 수는 없다. 절제니 금욕이니 하는 도덕적 가치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분고분 '돈'과의 긴장관계를 포기할 때, 돈이 권력이 되고 정의가 돈의 힘에 짓밟힐 때, 그리고 인간의 존엄마저 돈의 위엄에 짓눌릴 때,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야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야만이 가져올 황폐와 피폐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를 덮칠 것이기 때문이다.

2년 남짓 전에 '10억원이 생긴다면 죄를 짓고 1년 정도 감옥에 가도 괜찮은가?'라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이 질문에 고등학생 중 56%가 '그렇다'라고 답변을 했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어쨌든 죄를 범하더라도 즉, 타인에게 부당한 손해를 끼치거나 아픔을 주더라도 10억원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고등학생이 무려 반을 훌쩍 넘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유럽 여러 나라가 그렇고 우리도 오랫동안 그랬듯 돈 자랑을 부끄럽게 여기는 건 이제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자 되세요'란 말이 더는 특별할 것도 없는 보편적 언어, 다시 말해 모두가 추구하는 공통의 목표이자 제1의 가치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부자 되세요'의 업그레이드 버전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줄여서 '적일많버'가 등장했다. '워라밸'시대의 덕담이라고들 하지만 말 그대로 일은 조금하고 돈은 많이 받자는 거다. 여기서 핵심은 '나'와 '돈'이다. 타자, 즉 회사도 동료도 없다. 뭐 그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있느냐고? 편의상 '언어인지감수성'이라고 해두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의식을 휘젓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기준을 만든다.

'적일많버', 이걸 말할 때 부끄럽지 않고 들어도 불쾌하지 않다면 그게 잘못된 거다. 그리고 이것이 흔한 말이 되고 나면 다음에 올 덕담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만 많이 버세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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