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조선왕릉 가운데 하나인 사릉(思陵)을 조성할 당시 석재를 채취했던 채석장이 서울시 수유동 구천계곡 일대에서 확인돼 문화재(서울시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릉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사릉은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의 능을 말한다. 정순왕후는 남편 단종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난 비운의 여인이다. 단종이 상왕으로 있을 때 형식적으로 대비가 되었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노산군부인으로 전락했다.
정순왕후는 남편이 왕의 지위에 있을 때 왕비가 된 조선 최초의 왕비였다. 15세의 나이로 1세 연하의 단종과 혼례를 치르고 바로 왕비가 된 것이었다. 대부분 남편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빈으로 있다가 왕비로 지위 상승하는 것과는 달랐다.
1454년 1월 2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비로 책봉되면서 탄탄대로가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듬해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불운이 연속된다. 1457년 6월 단종이 노산군의 지위로 영월로 유배되고 4개월 후 세조에 의해 죽음을 맞으면서 그녀는 고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서울시 창신동에는 '자지동천'(紫芝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 밑에 샘물의 흔적이 있다. 정순왕후가 '자줏빛 풀이 넘치는 샘물'인 이곳에 흰 옷감을 자줏빛으로 염색해 생계를 유지했다는 일화가 전하는 곳이다.
마음의 상처가 컸던 탓인지 그녀는 불교에 크게 의지했다. 궁궐에서 은퇴한 여인들이 자주 찾은 비구니 처소, 정업원을 안식처로 삼았다. 정업원 인근 산봉우리는 그녀가 동쪽인 영월을 바라보며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 해서 '동망봉'(東望峰)으로 불린다. 단종의 유배지 영월 청령포에도 단종이 자주 올라가 왕비를 그리워했다는 노산대와 왕비를 위해 쌓아올린 돌탑이 남아 있어 부부의 애틋한 사연을 더해주고 있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과 이별한 후에도 정순왕후는 64년을 더 살았다. 1521년(중종 16)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사망한 후 무덤은 남양주시 진건읍에 대군 부인의 묘로 조성되었다.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 집안 종중의 산이 있던 곳이다. 해주 정씨 집안에서 복위 전까지 무덤을 관리했다.
왕비의 위상을 되찾은 것은 노산군부인으로 강등된 지 240여 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이었다.
단종이 복권되면서 정순왕후라는 왕비의 지위를 회복했고 무덤의 이름 또한 사릉으로 격상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단종의 신주를 사릉에 묻게 해 두 사람의 사후 만남을 추진했다. 초라했던 무덤이 왕비의 능으로 격상되면서 격식에 맞는 석물도 사릉에 배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를 기록한 행사 보고서인 의궤를 작성하였는데 사릉의 조성 과정을 담은 '사릉봉릉도감의궤'가 남아 있다.
사릉을 조성하기 위해 석재를 채취했다고 새겨둔 '사릉부석감역필기'에도 1699년 1월 사릉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석물을 채취하는 업무를 감독한 관리들과 석수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 이름들이 의궤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바위 글씨의 문화재적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대목이다.
조선의 왕과 왕비(추존 왕과 왕비 포함)의 무덤인 조선왕릉은 총 42기다.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총 40기가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왕릉 주변은 금표 지역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울창한 수목들이 좋은 경관과 함께 잘 남아 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함께 무더위까지 날려버릴 수 있는 곳, 조선왕릉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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