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추억으로 진한 향기를 내뿜는 수많은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사진'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고 몇 번의 '뽀샵'과 인터넷으로 쉽게 인화가 가능한 요즘, 우리 주변에서 '사진관'이라는 간판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세월의 무게를 버텨내며 사진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 있다. 안동시 풍산읍 안교리에 있는 '뉴-문화사장'은 시간이 멈춘 듯 80여 년을 한결같이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
◆권투선수에서 사진사로
뉴-문화사장 앞 진열장에는 유명 여배우가 환하게 웃고 있다. 컬러 사진이 흔치 않던 시절, 붓으로 수정작업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사진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손때가 잔뜩 묻은 오래된 수십여 대의 카메라와 사진 기자재가 눈에 띈다. 벽에는 결혼사진과 영정 사진, 특별한 날을 기념하거나 관광지에서 찍은 가족사진 등 다양한 사연을 담은 액자들이 걸려 있다. 뉴-문화사장 2대 대표 한문현(71) 씨는 "아버지가 사용했던 것"이라며 깊숙이 보관하고 있는 삼각대를 보여준다.
한켠에 스튜디오가 마련돼 있다. 스튜디오엔 화려한 레이스로 꾸며진 의자가 있고, 그 뒷벽엔 사진 배경용 스크린이 걸려 있다. 그리고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오래된 카메라와 조명, 기자재가 있다.
뉴-문화사장 1대 대표 한유술(1973년 작고)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서울서 사진을 배워 1940년쯤 풍산읍에 값비싼 사진기와 기자재로 사진관을 차렸다. 한문현 대표의 할아버지는 사진예술을 추구하는 아들(한유술)의 고집을 이해했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을 때라 손님은 없었다.
한유술은 사진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그러나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 대표는 "아버지는 상업적 사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신이 찍고 싶은 것만 찍었다. 손님이 만족해도 당신이 만족하지 않으면 사진을 주지 않을 정도로 사진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술을 좋아했던 한유술은 1973년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사진관은 한동안 주인 없이 비어 있었다.
한 대표는 아버지가 그토록 열정을 쏟았던 사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보다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정식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다. "1966년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로부터 WBA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을 쟁취했다. 김기수처럼 되는 게 꿈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중학교에 다녔던 한 대표는 권투도장을 찾았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야만 배울 수 있다는 관장의 말에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가 매달렸다. 그 열정에 감동한 관장은 한 대표를 받아주었다. 신인왕 대회에 나가 3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한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권투를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만큼 권투를 배우겠다는 집념이 강했다. "당시 아버지가 목을 매는 사진이 너무 싫었다. 어두운 암실에서 작업하는 것도 싫었고, 이리저리 불러다니는 것도 싫었다"고 했다.
그러나 서울생활을 힘들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권투 도장을 찾아 샌드백을 두들겼다. 4년 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973년, 스물넷 살 되는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맏이인 한 대표는 어머니와 중학교에 다니는 여동생,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 둘을 책임져야 했다. 집에 남은 것이라곤 사진관과 사진기자재 뿐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아버지의 뒤를 잇기로 마음 먹었다. "아버지의 한이 서려 있는 기자재, 아버지 혼이 녹아 있는 사진관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철없던 시절 야반도주 이후 아버지께 또 한 번 죄를 짓는 일이라 생각해 사진관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배우기 위해 다시 서울로 향했다. 1년 6개월간 열심히 사진을 배워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74년 아버지가 사용했던 '문화사장'이란 상호에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지를 담아 '뉴-문화사장'으로 간판을 새로 달았다. 그때부터 한 대표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뉴-문화사장의 새 시대
간판을 바꿔단 이후 손님이 없었다. 당시 풍산읍은 2만명이 되는 큰 도시였다. 경쟁도 심해 풍산에 사진관이 무려 6개나 됐다. "깡패 같은 놈이 사진관 한다는 말이 읍내에 퍼졌다. 그만 둘 수도 없었다. 10여 일 지나니 손님이 왔어요."
기회는 찾아왔다. 때마침 정부에서 도민증제도에서 주민등록증제도로 바꾸는 시행령이 발표되었다.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진을 찍기 위해 출장 촬영을 다녀야 했다. "풍산읍 36개 마을 중 34개 마을을 찾아다니며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증명사진을 찍었다. 돌아와서는 밤새 암실작업을 했다. 두 달 동안 무려 3천여 명을 찍었다. 90cc 오토바이를 타고 들을 달리고 강을 건넜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고 했다.
풍산초교를 비롯해 안동과 예천 등 인근 20여 개 학교 졸업 앨범도 그의 손을 거쳤다. 소풍이나 졸업 행사 때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새로운 시장에도 눈을 돌렸다. 예식장을 차렸는데, 주말이면 예식으로 성황을 이뤘고, 사진기는 쉼 없이 돌아갔다.
사진관은 명절이 되면 늘 사람으로 붐볐다. 사진이 귀했던 시절, 좋은 날을 기록하러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명절에 항상 문을 열어뒀다. "돈도 많이 벌었어요."
그러나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으로 손님이 줄었다. 사진을 출력하지 않고 카메라 자체나 노트북 등에 보관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인화지가 아닌 일반 프린터에서도 출력이 가능해지면서 사진관의 수입은 크게 줄기 시작했다.
현재 풍산읍에서는 사진관이 이곳만 남았다. 컴퓨터 작업을 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컴퓨터도 배웠다. "처음에는 그만두려 했다. 작업하다 사진을 날린 적도 많았다. 이제는 힘들게 포토샵을 배워 컴퓨터 작업도 한다"며 "싱긋 웃었다.
사진을 시작한 지 50년이 된 한 대표는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수없이 사진을 찍었지만 가족 사진은 거의 없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죠."
이제 사진관을 이어 배우려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내가 그만 두면 이제 문 닫아야 해요. 방법이 없니더. " 친근한 안동사투리 속엔 아쉬움이 가득 묻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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