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인을 이해하는 방법] <중>정신적 노화…노인의 고집

노인 정신건강 ‘자녀와 유대감’이 제일 중요
있는 그대로의 노인을 바라봐주는 시선 필요

# 최근 들어 모친(87)과 부쩍 자주 다퉜던 A(56·경북 경산) 씨.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전화 한 통이 없느냐, 왜 나를 신경 쓰지 않느냐'는 모친의 성화가 날이 갈수록 강해진 탓이었다. 정도껏 하다 그치겠지 싶었다는 A씨는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되는 모친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모친의 짜증은 점점 늘었고 행동은 어린아이처럼 변했다. 투정을 일삼는 모친을 언제까지 용인할 수만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전문가를 찾은 A씨는 생소한 표현을 듣게 됐다. 진단 결과 어머니가 '정신적 노화 과정에 있다'는 답을 받은 것이었다.

신체적 노화에 가려있던 노인의 정신적 노화가 드러나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상처를 더 받을 수 있는 정신적 노화는 특히 노인 부양 가족간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부양 기피 사유로 떠오르는 것이다. 정신적 노화의 악화가 가족 해체를 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정신적 노화란? 심리적 노화라고도 한다. 정서기능, 정신기능, 성격 등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내면을 일컫는 말이다.

대구광역시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집단심리상담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노인종합복지관 제공.
대구광역시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집단심리상담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노인종합복지관 제공.

◆빨간불 켜진 노인 정신건강

노인들이 오래 사용해온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든지, 그들이 과거 경험에서 터득한 가치관이 좀체 바뀌지 않는다든지 하는 건 자연스럽다. 늙어갈수록 인간의 기억을 과거에 머물게 하는 게 정신적 노화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세상이 변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세계로 침잠한다. 친숙한 물건들을 옆에 두어야 자신과 그 주변은 그대로 있다는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안정감을 주는 정신적 노화가 세대 간 갈등에는 선봉에 선다. 통상 '노인의 고집'이라 치부되며 그들만의 세계로 비치는 탓이다. 진퇴양난이다. 이렇게 벌어진 괴리는 관계의 단절을 불러오고 우울증과 같은 노년기 정신질환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난해 전체 우울증 환자 68만4천690명 중에서 60세 이상이 27만5천684명, 40.2%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증 환자의 10명 중 4명이 60세 이상 고령층이었다.

이는 연령별, 질환별로 구분해보면 두드러진다. 70대의 경우 우울증은 2010년에 비해 59.4%, 80세 이상은 176.5% 늘었다. 공황장애 진단을 받은 노년층의 증가세는 폭발적이다. 같은 기간 60대는 338.4%, 70대는 435.5%, 80세 이상은 929.2% 늘었다.

◆남성 노인의 정신질환 위험도가 더 높아

성별로 구분하면 남성 노년층이 더 취약했다. 지난해 대구지역 65세 이상 고령자의 고의적 자해(자살) 사망률은 인구 10만명 당 45.3명으로 여성에 비해 약 3.5배 높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살아온 세월 탓이었다. 노인 여성의 경우 평생을 가족 돌봄 노동에 시달려 온 경우가 많다. 자식 뒷바라지, 남편 내조, 때로는 시어머니의 괴롭힘을 견뎌야하는 감정 노동 스트레스 속에 시달리며 살아온 것이다. 혼자가 되어도 어떤 돌봄도 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되는 싱글라이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남성 노인은 반대다. 바깥활동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 버느라 바빴다. 자식과 아내와 떨어져 가족과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했다. 은퇴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족의 울타리에 들어오려 한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자식과는 어색하다. 혹여 권위적이고 가부정적이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면 자식과 보이지 않는 벽도 있다.

성환호 대구 월성종합복지관 대리는 "대구에도 자식과 연락을 끊은 채 혼자 남은 남성 노년층이 많다" 며 "과거 폭력을 사용하거나 가부장적인 모습을 통해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유대관계를 잘못 형성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신질환 고위험군으로 꼽히는 이들은 특히 재력이 있는 남성 독거노인이다. 재산이 없으면 정부의 복지 시스템에 기대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어 시스템을 활용할 수 없다. 재산이 외려 독으로 변한 셈이다.

복지 시스템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도 잦다. 경쟁을 통해 돈을 벌고 승진하는 것이 남성다움으로 평가됐던 옛 가치관의 영향이다. 일을 그만 두거나, 홀로 남거나, 집안일을 직접 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른 사회 활동마저 없다면 칩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이는 내면에 영향을 끼친다. 우울증이나 고독사로 이어지기 쉽다.

◆신체적 노화와도 직결, 건강에 악영향

대구 중구노인복지관에서 진행하는 사교댄스교실에서 남녀 어르신들이 사교 짝을 이뤄 춤을추고 있다. 대구 중구노인복지관 제공.
대구 중구노인복지관에서 진행하는 사교댄스교실에서 남녀 어르신들이 사교 짝을 이뤄 춤을추고 있다. 대구 중구노인복지관 제공.

심리적 스트레스는 신체 질병으로 번지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노년기에 맞는 우울증은 신체적 증상으로 곧잘 나타난다고 입을 모은다. 김희철 계명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는 "몸은 아픈데 검사를 해봐도 뚜렷한 원인이 없으면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경우일 수 있다"며 "노년기 우울증은 '슬프다, 우울하다'는 기분이라기보다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기 쉽다"고 설명했다.

노인의 정서적 흔들림은 대개 자식과의 불화, 유대감 약화에서 시작된다. 자녀의 경제적 부양보다도 정서적 부양이 노인 생활만족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과 사회로부터 역할 상실, 자녀세대와의 가치관 갈등으로 노인은 고독감과 소외감에 노출되기 쉽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마리아 마리아상담소 노인심리전문 상담가는 "자녀와의 정서적 유대감은 가족 내에서 본인의 존재 의미를 찾는 것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며 "노년기의 사회적 관계가 주로 가정 안에서 지배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성인 자녀와의 관계는 정신적 노화 억제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대구 중구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성인문해력 향상을 위한 한글교실에 참여하고 있다. 대구 중구노인복지관 제공.
대구 중구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성인문해력 향상을 위한 한글교실에 참여하고 있다. 대구 중구노인복지관 제공.

특히 전문가들은 노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게 노인의 정서적 안정에 도움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항우울제 같은 약을 쓰기 전에 노인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상담만 해도 신체적·심리적 증상이 호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희철 계명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는 "가족 간 서로 인정하며 소통을 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도 중요하다"며 "사회복지인력이 충원돼 집집이 관심을 두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 지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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