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시종일관 싸워댄 정치권
사회 전체가 온통 싸움판으로 보여
지도자라면 모두가 싸우자고 할 때
공존의 길 찾아 보여 줄 수 있어야
'킹덤 오브 헤븐'은 십자군 전쟁을 다룬 영화다.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이 영화의 막바지쯤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예루살렘은 무엇이오?" 발리안(올랜도 블룸 분)이 불현듯 묻는다. 그러자 살라딘(가산 마소드 분)이 태연스레 "아무것도 아니오" (Nothing)라고 답한다. 그런 다음 씩 웃으며 "모든 것이기도 하고"(Everything)라며 한마디를 덧붙인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이슬람 양쪽 모두의 성지다. 발리안은 그 예루살렘을 지키는 십자군의 대장이고 살라딘은 자신들의 성지를 되찾으려 군대를 몰아온 이슬람의 왕이다. 양측은 몇 날 며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하지만 승부는 나지 않고 계속되는 싸움에 병사들의 희생만 늘어 갔다. 게다가 도시마저 점차 파괴되자 두 사람은 결국 얼굴을 마주한 채 협상을 시작한다. 발리안은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살라딘은 기독교인들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할 것, 둘은 그렇게 합의함으로써 상황을 타결한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살상과 파괴도 막을 내린다. 위의 장면은 협상을 막 끝내고 돌아가던 살라딘을 향해 발리안이 혼잣말처럼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사실, 종교적 또는 상징적 의미를 제외하고 나면 예루살렘이 그리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땅은 아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이교도를 모조리 멸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발리안은 기독교인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으로, 그리고 살라딘은 이슬람의 자존심을 지켜낸 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은 그들과 그들 세상의 평화와 번영을 원했고 그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둘은 서로 통했고 의표를 찌르는 질문과 절묘한 답변이 그래서 나올 수 있었다. 비록 영화 속 이야기지만 천 년 전에도 그랬다. 상대를 쳐서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세상을 덮을 때도 그렇게 하면 결국은 공멸하고 만다는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조금 뜬금없을지 모르겠으나 올해는 우리 정치도 좀 그랬으면 좋겠다. 지난 한 해 국회는 문 연 날 치고 안 싸운 날이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문을 열기 전에도 싸웠고 문을 닫은 후에도 싸웠으며 급기야 문을 어떻게 열 것인가와 어떻게 닫을 것인가를 두고도 싸웠다. 물론 국민을 대신해 싸움도 하라고 국회로 보낸 국회의원들이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그들은 등 뒤로 수천 만의 국민이 지켜보고 있거나 말거나 한 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만 웃다가 삐치고 화내고 비난하더니 결국엔 몸싸움까지 해가며 시종일관 싸워댔다. 예전에 한 초선 국회의원이 그랬다. 그 안에 들어서면 그곳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여론조사기관들과 미디어도 한몫했다. 눈만 뜨면 정당 지지율과 대통령 지지율이 보수 대 진보, 몇 대 몇으로 나뉘어 흘러나왔다. 마치 격투기 선수들이 매 라운드 상대를 가격해 따낸 점수처럼 말이다. 때론 정치권을 넘어 사회 전체가 온통 싸움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더구나 보수와 진보는 실체조차 모호하다. 정치적 이념이 실제적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에서 그 사람의 정치적 행위가 비롯되고 그것으로 그 사람의 정치적 선택이 매듭지어져야 한다.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다. 이념에 따라 정치적 선택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선택에 따라 이념이 달라진다. 그러니 누가, 무엇 때문에, 왜 그 편에 서서 싸우는지 설명이 안 된다. 심지어 보수 정치인도 보수의 가치를 모르고 진보 정치인 또한 진보가 뭔지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여론조사기관들은 새해에도 변함없다. '당신의 이념적 성향은 무엇입니까?'를 무슨 인적사항 묻듯이 반복한다. 다른 결괏값들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리고 굳이 그게 필요하다면 그 값을 구해내는 건 자기들 몫의 일일 텐데 말이다.
올해는 총선까지 있는 해라 더 난망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좀 하자. 그까짓 이념, 배고플 때 밥 한 그릇만도 못 한 것 아닌가? 역사에서 증오와 저주, 대결과 적개심이 시대정신을 대신했던 적은 없다. 적어도 지도자라면 모두가 싸우자고 할 때에도 협상하고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 공존의 길을 찾아내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올해는 그렇게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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