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는 그리스어로 전체(hólos)를 태운다(kaustós)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동물을 잡아서 태우며 연기를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인 번제(燔祭)에서 유래하였다. 1933~45년 사이에 있었던 홀로코스트 결과 유럽의 유대인은 600만 명이 죽고 350만 명 정도가 살아남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나치의 유대인 절멸캠프에는 20만 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소련군이 동부에서 진격해오자 나치는 수용소를 폐쇄하고 수용자를 이동시켜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1945년 1월 18일 엄청나게 추운 겨울밤에 6만 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은 서부에 위치한 우지슬라우로 향한 야간 행진으로 내몰린다.
수천 명은 이미 며칠 전에 학살되었다. 대부분은 얇은 옷차림에 신발도 없었고, 쓰러지거나 따라올 수 없는 사람들은 즉시 사살되었다. 도보로 예정지에 도착한 수감자들은 난방이 없는 기차로 다시 독일로 옮겨진다. 이미 영양실조나 질병을 앓던 상태인 이들에게 물과 식량도 제공되지 않았다. 이 겨울밤의 '죽음의 행진'에서만 1만5천 명이 죽었고, 그해 봄까지 5만 명 이상이 총살당하거나 사망하였다.
유대인들은 강인하였고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 이름을 바꾸고 출생지를 속여 타 민족 주거지에 숨어들었고, 가끔 선한 이웃의 도움을 받았다. 해방된 나치의 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가족과 집을 잃었고, 그들 고향의 반유대인 정서로 귀환할 곳도 없었다. 5만 명의 동유럽 유대인들은 2차대전 승전국가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지역에 설치한 재배치캠프에 수용되었다.
이들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1946년 당시 독일의 18만5천 명을 비롯하여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캠프에 25만 명이 수용되었다. 여기서는 살해의 위험은 없었으나 생활은 고달팠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중동부 유럽 출신자를 중심으로 13만여 명이 고국으로 떠났다. 나머지는 유럽 국가나 미국으로 떠났다. 소련의 유대인들도 소련이 해체되며 이후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홀로코스트에서도 살아남았던 생존자들은 또 다른 고통을 마주하였다. 우선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여야 했다. 종교적인 민족 유대인들에게 지옥과 같은 상태에서도 신의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영적 좌절이었다고 한다. 생존자들은 홀로 살아남았다는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는 생존자증후군을 겪었고 자살자가 속출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목숨을 부지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모했기에, 사랑하거나 살해당한 동료를 애도하는 감정조차도 없었다.
직접 참극을 겪지 않았던 생존자의 후손에게도 정신과 환자가 많았다. 타인과 교감하고 연결하는 능력이 떨어졌던 생존자들의 트라우마가 유전자로 전달된 것이다.
1940년대 후반 유대인 생존자가 만들었다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모습의 대리석 조각을 올린 청동 종을 만났다. 긴 수직 줄이 쳐진 얇은 옷차림의 깡마른 사내가 초점을 잃은 모습으로 무감각하게 시선을 주고 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만났던 사진 속 수용자의 바로 그 모습이다. 동유럽의 어느 생존자는 아우슈비츠의 아픈 기억을 잊으려, 아니 잊지 않으려 이 종을 만들었다. 말로서는 전할 수 없는 아픔이 담긴 종소리가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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