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손갤러리 이명미 'VENI VIDI VICI'전

이명미 작
이명미 작 'Landscape' (1997년)

"화가가 그림에 갇혀서는 안 된다. 화면에서 나는 자유롭게 놀고 싶다. 삶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일단의 사건들이 우연히 겹쳐진 게 인생이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가가 되고 싶다."

40여년 그림을 업으로 해온 이명미(69)의 이 말은 그녀의 삶과 인생 지표를 콕 집어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박서보 이우환 하종현 등의 단색화가 화단을 휩쓸고 있을 당시 20대의 이명미는 단색화 1세대 선배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류에 편승하기보다는 힘겨운 삶일지라도 오롯이 그 삶을 끌어안는 미술"에 꽂힌 그녀는 동시대 트렌드와는 다른 추상미술을 추구하기로 했다.

이명미의 그림은 언뜻 글을 깨우치려는 어린 아이의 습작노트 같다. 자칫 유치할 수 있는 낙서 비슷한 조형에 한글과 영어가 뒤죽박죽 섞여있다. 그런가 하면 오려 낸듯한 그림을 화면의 프레임 이곳저곳에 집어넣은 작품도 있다. 개, 늑대, 화분, 병 등이 어떤 이미지나 논리성 없이 이럭저럭 배치돼 있기도 하다. 도발적 발상의 화풍이 작가의 경륜을 모르고 작품을 보면 아주 젊은 작가가 그린 것 같은 오해의 소지도 많다.

이른바 1977년부터 '놀이=그림'이라는 모토아래 작가가 추구한 추상미술의 전개이다. 기존 미술 경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성과 직관에 따라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 구축하고 예술적 표현을 즐거운 관능으로 전환한 '놀이'의 시작이었다.

이 때문에 이명미 작품은 "놀이는 삶의 원초적 모습"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화면에 녹아있다. 변화가 있다면 초기의 노랑 위주의 바탕색이 회색 분홍 흰색 등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작가의 그림 속 텍스트는 혹여 덜 표현된 이미지의 보충 작용을 한다.

작가에게 놀이는 점점 다양하고 복잡해지는 삶의 조건 속에서 예상치 못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우연에 대한 긍정은 세계와 삶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33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의 제목이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인 것은 이러한 작가의 열정과 긍정의 자세에 보내는 찬사인 셈이다.

동물과 사람, 식물 등 생명을 지닌 존재들부터 집과 의류, 음식, 가구 등 심지어는 숫자와 문자 같은 사회적 의미를 가진 존재에 이르기까지 일상적 삶의 요소가 회화적 언어를 형성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은 소외된 일상의 평범한 것들을 화려한 색채 위에 원근감도 없이 단순하고 명백하게 표현함으로써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한 표면을 통해 사물의 재현이라기보다 시대 속에서 태어난 삶의 패턴처럼 이미지의 언어적 기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작품 특성은 어떤 특정 미술양식에도 포함되지 않아 평론가들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까닭은 이명미의 작품이 일면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정서로 돌아가는 근원주의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본 듯하기도 하고, 일상생활의 소재를 화려한 컬러와 반복적 패턴으로 표현하는 팝아트적 요소를 갖는 동시에, 보편적 진리보다는 주관적 감성과 형식으로 삶의 본질을 표현했던 표현주의와 같은 여러 모더니즘의 미술형식과도 동시다발적으로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은 어떤 장르에도 속해있지 않고 제한 받지 않는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면에서 나는 자유롭게 놀고 싶다. 혹여 전체 프레임에서 미진한 점이 있다면 직접적인 언어인 텍스트를 써 넣어야 비로소 속이 후련하다."

실제로 이명미는 1970년대 중반까지 스펀지를 불에 태우거나 캔버스에 비닐을 부착하는 등 물성을 이용한 단색화 스타일의 실험성 강한 작품을 제작했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갈 곳도, 재미도 느끼지 못하면서 기존 미술 경향을 벗어나 자신의 감성과 직관에 따라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 구축하고 예술적 표현을 향한 자유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의 결과물들을 이번에 우손갤러리에서 한껏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전시는 3월 13일(금)까지. 문의 053)427-7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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