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재목의 아침놀] 어쩌랴, 내 마음속의 '쥐'를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상주 출신의 유학자 소재 노수신(1515~1590년)의 시를 읽는다. 그는 진도에서 19년간 귀양살이하며 아픔을 달래는 많은 시를 썼다. 올해가 '흰 쥐의 해'여서일까, '생쥐'(鼷)라는 시가 눈에 띈다.

"머리를 쳐들고 등경 뒤쪽을 냄새 맡다가/ 멀리 밥상 가를 타고 다니곤 하네/ 요즘 들어 내가 잠을 잘 이룰 수 있어서/ 요놈이 구멍 뚫는 것을 거듭 살피지 못했더니만/ 벼루를 지나다가 먹물을 적셔 가지곤/ 책을 헤집고 다니며 성현의 문자를 더럽히기까지 하네/ 무심하게 말없이 웃노니/ 네 놈의 목숨 또한 하늘에 달려 있노라!"

한밤 중의 깜깜한 시골집 천장과 방구석으로 으레 찾아들던 불청객. 어릴 적 나도 그걸 경험해 봤다. 쥐는 자유분방하다. 인간들의 윤리나 룰 따위엔 아랑곳 않고 온 방을 헤집는다. 벼루의 먹물을 몸에 묻혀 성현의 문자가 적힌 책장에다, 왕희지가 처음 만들어 썼다는 서수필(鼠鬚筆·쥐 수염 붓)인 양 찔끔 낙서까지 한다. 우스꽝스러우나 요놈은 참 운도 좋다. 대학자의 시에 캐스팅돼 이날까지 살아남았으니. 쥐는 욕쟁이의 입에 담기면 '쥐새끼'로 바뀌나 가끔 '양상군자'(梁上君子) 같은 멋진 칭호도 얻는다.

시 황제를 도와 진나라의 통일에 공을 세운 이사(李斯). 그는 초나라 사람으로 하급 관리였는데, 어느 날 관청의 변소에서 쥐가 오물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나타나면 깜짝 놀라는 것을 본다. 또 다른 날, 창고에 있는 쥐들이 곡식을 먹어대면서도 사람이나 개를 겁내지 않는 것을 보고 깨달아, 탄식한다. "사람의 현명함과 현명하지 않음은 쥐와 같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달려 있구나!" 호화로운 곳에 살면 고급 음식을 누리고, 지저분한 곳에 살면 추잡한 것을 먹어야 하듯, 쥐는 처한 여건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 결국 그는 부유한 집의 쥐처럼 살기 위해 초나라를 떠난다.

서양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흑해 연안의 도시 시노페에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나, 사기를 치고 죽은 아버지에게 충격을 받아 아테네로 도망친다. 빈털터리의 구차한 생활을 하던 어느 날, 그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한다. 밤이 와도 개의치 않고 음식물도 건드리지 않는 쥐를 보고 그는 깨닫는다. 궁핍 속에서도 만족을 느끼고, 어떤 구속도 없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쥐에게 배워, 그는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맨몸으로 무소유의 삶을 누린다. 견(犬) 유학자가 아닌 쥐 같은 학자로 산다.

옛날 중국에서 생겨난 '자-축-인…'의 십이지(十二支). 이 열두 마리 우주 동물원 속에서 쥐는 서열 1위다. 보통 자시(子時)에 하늘이 열리고, 축시(丑時)에 땅이 열리고, 뒤따라서 인시(寅時)에 사람이 생겨났다고들 한다. 우리 설화에는 쥐의 앞 발가락이 4개, 뒷발가락이 5개인 것을 이렇게 풀이한다. "앞발이 짝수(陰), 뒷발이 홀수(陽)인 것은 자정을 축으로 앞쪽은 음기의 시간, 뒤쪽은 새로 하루가 시작되는 양기의 시간을 가졌다는 뜻. 그래서 열두 때에 자시가 제일 앞에 온다!" 앞발은 깜깜한 야(夜)자시, 뒷발은 새벽이 오는 조(朝)자시이리라. 위 다섯 효(爻)는 전부 음이나 맨 밑바닥에 한 가닥 양 효가 꿈틀대는 지뢰복괘(☷☳)가 떠오른다. 깜깜한 어둠에서 한 줄기 빛이,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에 따신 기운이 들어서는 때다. '불경'에는 호랑이에 쫓기다 구덩이에 뛰어들어 가까스로 붙잡은 넝쿨을 갉아 먹는 쥐 두 마리가 등장한다. 밤낮이라는 시간의 은유이다. 송곳니로 쥐가 물건을 갉아대듯 해도 달도 차면 기운다. 아울러 쥐는 새끼를 많이 낳아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이것을 서산(鼠算)이라 하며, 풍요의 근거가 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육신이 있어 죄가 깃들었다'고 번민했다. 육신의 숲에는 쥐뿐만 아니라 개・돼지, 악마도 숨어 산다. 인간은 그들과 밀회하며 흉내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쥐 이야기는 모두 인간 자신의 그늘이거나 빛이다. 쥐띠 해에 마음속의 쥐를 사랑할지 잡을지 공부했으면 좋겠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