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섭의 광고 이야기] 글에도 그릇이 있다.

㈜빅아이디어연구소 김종섭 소장.
㈜빅아이디어연구소 김종섭 소장.'광고인의 생각 훔치기' 저자

대구시의회에서 광고 의뢰가 들어왔다.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싶은데 그 표현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광고주가 그렇듯 브랜드의 문제점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표현에 약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닭살 돋는다는 핑계로 말이다. 여기에서 광고인의 역할이 시작된다. 그 마음을 낭만적으로 표현해주는 것, 같은 한국말이어도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꿔주는 것에서 우리의 일은 시작된다.

사설 기관과는 다른 보수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사실 공무원들과의 작업은 재미있는 동시에 힘든 경험도 많았다. 늘 바꿔야 하는 광고인의 입장과 바꾸면 힘든 시스템인 공무 기관의 싸움이었다. 그 속에서 큰 희열을 느낀 적도 많았다. '내가 공무원을 설득시켰어!'라고. 하지만 나쁜 버릇이 생겼었던 적도 있음을 고백한다. 공무원들과 일할수록 그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을 너무 잘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고객(의회)의 고객(시민). 즉, 시민들의 마음을 만질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공무원 마음에 드는 광고를 할까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나중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민의 혈세로 만드는 광고인데 내가 왜 공무원 비위만 생각하고 있나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소비자(시민)가 보였다. 그렇게 되니 공무원이 좋아하면서도 시민도 좋아할 만한 메시지를 찾게 되었다. 작업 노트에 공무원이라는 큰 동그라미와 시민이라는 큰 동그라미를 겹치게 그렸다. 그리고 교집합된 부분의 메시지를 찾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게 찾은 메시지가 '시민의 작은 목소리도 크게 듣겠습니다'라는 문장이었다. 보통 시청이나 의회의 광고를 보면 지키지 못할 달콤한 말만 하는 경우가 많다. '시민의 삶을 바꾸겠다. 시민이 행복한 사회로 만들겠다'가 바로 그런 광고다. 그러나 모두에게 어필하려는 메시지는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건 역시 예산 낭비이다. 작은 약속이라도 지킬 수 있는 말을 해야 팔린다고 생각했다. 카피를 쓰고 어떤 그릇에 담으면 좋을지 고민했다. 큰 고통 없이 답이 보였다. 시민이 아주 작은 말을 하더라도 크게 듣겠다는 것을 표현하면 되었다. 즉, 문장의 시작은 아주 작게 쓰고 점점 글이 커지는 디자인을 한 것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누군가 오디오 볼륨을 높인 것처럼 점점 글이 커지는 모습이었다. 사실 '시민의 작은 목소리도 크게'라는 워딩은 굉장히 식상할 수 있다. 누가 봐도 시청이나 의회에서 할 법한 말이다. 하지만 모든 글에는 그에 맞는 그릇이 있는 만큼 그릇을 잘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렇게 글에 꼭 맞는 그릇을 찾으니 단순한 글이 소비되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정말 고통스럽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돈을 받고 글을 파는 필자의 경우 더욱 그렇다. 아이디어 발표일까지 글이 나오지 않으면 상당히 괴롭다. 그렇다 보니 재능이 없는 사람도 잘 쓴 것처럼 보이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말을 담는 그릇의 발견은 그 고통의 산물이었다. '어떻게 하면 소비되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같은 글이어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보일까?'라는 질문의 결과였다. 귀한 손님에게 주는 음식을 못난 그릇에 담는 때는 없다. 음식 맛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예쁜 그릇으로 만회하려 한다. 세상을 상대로 마케팅을 할 때 끝까지 고민해봐야 한다.

글은 물고기와 같다. 물에서 건져 그릇에 두면 어떤 그릇은 담아내지 못하고 물고기가 떠나버린다. 어떤 그릇은 신선한 물고기를 잘 가두어 놓는다. 좋은 카피를 썼더라도 고민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 카피의 향기를 극대화할 수 있는 그릇(디자인)을 꼭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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