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세계를 전장으로 만든 일본은 보국을 강요하였고, 많은 조선인들은 전쟁의 도구로 끌려가 희생되었다. 화가 이경희(1925-2019)는 이 때 징집되었다가 천운으로 살아왔다고 증언하였다. 본적지인 한국에서 징병검사를 받겠다며 일본에서 귀국하였고, 비행기병으로 선발되어 훈련을 받고 가미가제용 비행기를 탈 순서를 기다리던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사선에서 돌아온 그의 운명처럼 해방은 말 그대로 억압의 해소와 자유를 가져다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여전히 또 다른 강력한 힘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50년 사이 많은 사람들은 사상과 진영을 두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화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쾌대(1913-1965)는 해방 후 좌익미술단체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1947년 '신천지' 2월호에서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에 집중하는 사회주의 미술의 현실을 비판하였다. 이후 좌익 예술인 검거로 불안을 느낀 이쾌대는 정치적 경향을 배제한 진정한 민족미술의 건설을 표방한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성북회화연구소를 열어 작품제작과 미술교육에 전념하였다. 혼란의 와중에서도 이쾌대는 작품을 통해 민족해방이라는 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해방즈음부터 시작해 1940년대 말까지 그린 군상 시리즈는 '군상Ⅰ(해방고지)'를 비롯해 100호에서 200호에 이르는 대작 4점으로 구성되어있다. 작품에서는 민족적 수난에서 시작하여 현실의 고난을 헤쳐나가는 민중의 모습, 해방을 맞이하는 환희와 희망 등 자신이 꿈꾸었던 민족의 이상을 대서사시로 펼쳐 보였다. 탄탄한 데생과 기본기를 바탕으로 표현한 인물의 사실적인 묘사,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키는 근육질의 나신의 군상, 이야기를 끌어가는 역동적인 구성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역작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두 진영 모두에게 비판받았다. 당시 좌익에서 대두된 '혁명적 로맨티시즘과 리얼리즘' 논쟁은 좀 더 선명한 리얼리즘을 구현한 확실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였고, 그의 사상을 의심하고 예의주시하던 남한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표현을 위축시켰다.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을 그린다는 이유로 파출소에 불려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라 주장했던 일화도 있다.
또한 개인의 자유의지 없이 극심한 혼란기에 강요받은 정치적 입장과 부역은 엄청난 후한으로 다가왔다. 한국전쟁 전 그는 남한진영에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사상전향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서울에 남아있던 이쾌대는 북한군에게 과거 보도연맹에 가입한 일로 또다시 정치적 전향을 강요받아 인민군 종군화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많은 고민 끝에 결국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둔 채 북한으로 가는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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