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성(城)/ 이범수

이범수
이범수

저물녘, 감빛 노을 한 자락을 잡고 성을 오른다. 그곳 팔각정엔 세월한테 외면을 당한 소리, 소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왕조의 하늘을 풀어놓으며 저마다 손짓을 한다. 아예 젖무덤까지 까발린 모습들도 있다.
언제 들어도 실증을 모르는 그들의 무채색 이야기는 가을 이맘때가 가장 들을 만하다. 나는 그들과 나누어 가질만한 믿음을 찾아 먼저, 오늘에서 나를 멀리 떼어놓는다. 역사를 들여다보는데 연민(憐愍)만큼 나를 헷갈리게 하는 건 잘 없다. 지혜로운 자들의 속삭임도 항상 나를 흔드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또 하나 배운다.

성의 존재의미는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다름에 있다. 다름은 모양이나 색깔이 아니다. 옳고 그름, 좋고 나쁨과도 별개의 문제다. 그 다름은 형체가 아닌 인식에 뿌리를 두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다름에는 상대적, 시대적 불화가 한가운데서 가치 싸움을 하고 있다. 때문에 한 쪽에서 그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다른 쪽 가치는 덩달아 유효하다. 검정은 하양이 있기 때문에 더 희고 하양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내가 연민을 쉽게 못 버리는 고민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서로가 미워하면서도 때로는 그리워하며, 하지만 호적수로, 쌍수도(雙手刀)의 양날로 존재한다.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 가슴속에 유형, 무형의 성을 하나씩 만들어 쌓아놓고 살아간다. 성은 고유의 영역이며 공간이다. 동물이 분비물로 자기들의 생활반경을 다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성은 방어가 목적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유혹으로, 올가미로 변하기도 한다. 하나의 깃발로 나부끼어 으르렁 댈 때도 당연히 있다. 하늘의 거미줄도 또 하나의 거룩한 성이다. 성은 경계를 표시하는 울타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은 역사를 요리해서 먹고 사는 유령이다. 고도(古都)에서, 관광지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곧잘 성을 만난다. 지난날 영화를 더듬어 얼기설기 복원해놓은 곳도 있지만, 풍마우세(風磨雨洗)에 빛을 잃어 세상과 이별을 서두르는 곳도 있고, 이미 자기 살을 다 뜯어먹어 빈터에 팻말 하나가 그냥 일러주기만 하는 딱한 곳도 많다.
어느 성 치고 영고성쇠의 생로병사는 피할 수가 없나보다. 한 예로 잉카문명으로 남아있는 마추픽추를 찾노라면, 아니 이야기만 나와도 나는 허상과 인욕의 세월을 버티어 온 민초들의 함성과 절규를 듣는다. 성은 보호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희생을 담보로 태어나, 마침내는 그 회생한테 조차 그리움이 못되는 하나의 허물로 버려진 게 태반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구조물 가운데 인공위성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는데, 중국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광활한 사막 위에 죽은 한 마리 뱀의 형상으로 누워있다는 것이다.
당나라 태종은 만리장성 저쪽의 흉노족과 화친을 성공적으로 체결하고 돌아온 이세적(李世勣) 장군에게 그 공을 치하, <人賢長城(인현장성 : 장성을 쌓아 막무가내로 막는 것보다 사람을 통한 소통이 더 현명하다)>의 네 글자가 든 족자를 하사했다. 만리장성을 쌓아놓고도 안심하지 못했던 그 좌불안석을 마침내 사람으로 풀었다는 그 공을 만천하에 알려, 성의 무용론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장성의 배경 없이는 어려웠다는 게 후일담이고 보면 때때로 성은 필요악으로서 존재 의미를 갖기도 한다.
성도 진화를 서두른다. 요즘 성은 성채(城砦)가 아예 없다. 사이버 공간에다 쌓아두어 그 높이와 위험도 알 수가 없다. 바다에도 성이 있고, 하늘에도 성이 있다. 자세히 눈을 닦고 들여다보면 너와 나 사이에도 분명히 성은 있고, 우리는 그 성을 지키기 위해, 또 넘보기 위해 저마다 최상의 수단을 동원한다.
시대는 지구촌과 글로벌을 추구하면서도 성은 여전히 알게, 모르게 자꾸만 곳곳에서 더 높게, 더 튼튼하게 쌓여가고 있다. 성 때문에,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성도 허다하다. 엄살이 아니다. 이러저러한 설익은 담론들이 모여 하루아침에 없던 성이 또 하나 태어나기도 한다.
대다수 성은 탐욕의 상징물이다. 화려함에서 그러하고, 웅장함에서 그러하고, 그 깊이에서 더욱 그러하다. 깊은 만큼 탐욕은 무성하고 난해하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현인이 숨고 미련한 자가 득세를 한다. 미련의 결정(結晶)이 탐욕으로 변하는 건 순전한 자만의 횡포일 수도 얼마든지 있다.
구비치는 역사의 물줄기를 가로막은 만리장성, 머리를 구름 속으로 숨긴 한 마리 뱀으로 누워있는 장성 위로, 오늘도 수많은 관광객들은 역사란 이름으로 떠다니는 그들만의 소리를 여과 없이 즐긴다.
제왕의 웅지를 이야기 하는 사람, 도로(徒勞)로 남아 있는 허상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 민초를 밟고 휘날리던 도포자락에 입맛을 다시는 사람, 성을 돌아보는 그들의 표정도 각양각색이다. 한 마리 큰 뱀이 새로 살아 꿈틀거린다.
성은 저마다 당신 이야기를 하나씩 만들어 숨기고 살아간다. 만나는 성마다 하소연들이 다투어 엄살이다. 들어줄만한 읍소도 없는 건 아니지만, 함부로 밭을 수 없는 행방이 수상한 소문들을 제 것인 양 품어, 앙가발이 짓으로 사람을 곤혹스럽게도 만든다. 필요에 의해 쌓은 것까지는 모두가 공유한다. 엉뚱한 의기투함이 성으로 태어난다는 것도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고성낙일(孤城落日)에 동정할 필요는 천만에 없다.

이 가을, 성터는 역사소설의 마지막 장에나 나옴직한 가랑잎 뒹구는 소리로 마냥 처연하다. 말발굽소리 아득히 멀어간 노둣돌 옆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낙목한천도 까맣게 잊은 채 아직도 한양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달개비풀 한 포기, 오늘 나는 그 풀의 이야기를 듣는다. 폐서인으로 버려져 살아온 그의 서러운 세월을 듣는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