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원재의 삶 갈피]기우제와 꼰대 문화

기우제 예보와 꼰대 문화

박원재 율곡연구원장
박원재 율곡연구원장

장마가 '끝났다.' 이 말이 올해처럼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경우도 없었던 듯하다. 올해 장마는 기간도 길었지만 전국에 걸쳐 기습적인 집중호우가 많아 더 큰 피해를 안겼다. 예나지금이나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하면 원인을 분석하며 속죄양을 찾는 게 사람들의 심리이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자원공사를 필두로 지역의 저수지와 하수시설 그리고 산지개발 허가권을 쥔 지자체 공무원들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기상청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국지성 집중호우의 빈발로 예보가 많이 빗나가 심지어는 '기우제 예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서 비가 오면 기우제의 효험 때문이라고 믿었다는 인디언의 풍습을 빗댄 풍자다. '기상 망명족'이라는 신조어도 회자된다. 기상청 예보를 못 믿다보니 해외 기상청 예보에서 우리 날씨를 검색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현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예보'는 말 그대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의 내용을 미리 알리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대한 예측을 전제로 한다. 그럼 그 예측은 어디에 근거할까? 그때그때 기분에 따른 마구잡이 짐작에 근거할까? 당연히 아니다. 예보의 근간이 되는 예측은 이미 일어난 유사한 사례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모종의 규칙성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모든 예보에는 하나의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지금까지와 같은 조건이라면 앞으로 일어날 일도 비슷한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가정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언제나 지금까지와 같은 조건에서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내일 아침에도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확신은 어디에서 올까? 유감스럽게도 이 확신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지구는 서에서 동으로 자전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이다. 우리가 그렇게 신뢰해마지 않는 과학적 지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과학은 자연이 지금까지 운동변화해 온 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운동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지식의 체계이다. 이것이 과학적 지식의 본성이다. "물은 100℃에서 끓는다."가 참인 것은 1기압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바로 그 경우에서만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상황이 등장하여 기존의 지식이 들어맞지 않는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 새로운 조건까지 수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수정된다. "물은 용기의 내부와 외부의 기압이 같아질 때 끓는다."라는 식으로.

지구상의 생명처럼, 과학적 지식 또한 새로운 상황에 부딪히면 그것을 반영함으로써 꾸준히 진화한다. 과학자 공동체의 민주성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에 반하는 주장들이 자유롭게 제기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과학적 지식이 자신은 언제어디서나 타당한 진리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근래 일상화된 용어를 빌린다면 그것은 '꼰대' 문화일 뿐이다. '꼰대'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틀릴 수 있는 경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반 조건들이 다름에도, 그것은 자신의 삶의 경험을 절대화하여 젊은 세대들도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자신이 적용되는 범위와 한계를 분명히 하지 않는 주장은 독단이다. 세상에 그런 지식이나 경험은 없다. 과학조차도 그렇다.

그러니 '기우제 예보'라는 비아냥에 기상청이 풀 죽을 일이 아니다. 기상예보도 기본적으로 과학적 행위이다. '기상이변'이라는 표현이 잘 말해주듯이, 근래 예보가 자주 틀리는 것은 기후재난으로 기존의 규칙성을 벗어나는 예외적인 상황이 자꾸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 기상청의 그간의 실력을 미루어볼 때, 기존의 데이터에만 의지하는 꼰대 문화에 안주하지 않고 작금의 예외적 조건들을 신속하게 분석하여 새로운 규칙성을 도출해냄으로써 조만간 예보 적중률을 다시 높여나갈 것이라 믿는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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