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80㎞ 길이의 파나마 운하는 1914년 8월 15일 개통되었다. 처음 운하 공사를 계획했던 프랑스의 레셉스는 1878년 회사를 설립하여 해수면을 파는 공사를 시작하며 7년이면 충분하다고 자신했으나, 돌과 산악 지형인 파나마 지형에서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도중에 계단식 갑문 공사 방식으로 변경되었으나, 차그레스강의 홍수와 속출하는 풍토병에 의한 사망자와 연계되어 회사는 도산하고 공사는 중지되었다.
운하 공사는 운하의 최대 이익국이 될 미국이 굴착권과 공사 설비를 인수하며, 1904년 재개된다. 미국이 신생 독립국 파나마로부터 운하 양변 10마일(16㎞)에 대한 사용 점유권을 인정받게 되자, 철도 전문가였던 책임자 스티븐스는 우선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에 노력한다. 노동자들에게 청결한 숙소, 상수도와 충분한 음식을 제공하며, 기술적인 진전을 위해 매진한 것이다. 그는 계단식 운하 건설을 위해 산을 굴착하여 철도 레일을 놓았고, 강 수위 조절을 위해 댐을 건설하고 만들어진 호수를 운하로 이용하였다. 특히 황열 전문 군의관인 고가스 대령을 투입하여 황열의 매개체인 모기 서식지를 제거했다. 스티븐스에 이어 미국 공병대가 투입되고 재정지원이 충분하게 되자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착공 10년 만에 운하가 완공되었다. 파나마 운하의 완공은 건설 도중 공사장의 붕괴와 황열로 사망한 미국과 프랑스의 노동자 2만7천 명의 희생에 힘입은 바가 크다.

20세기 마지막 날인 1999년 12월 31일 운하의 운영권은 파나마로 반환되었으나, 아직도 운하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운하의 이권 유지를 의해 파나마는 법에 의해 군대 보유가 금지되어 있고, 파나마 정부가 반미 정책을 펴자 미군이 정부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1915년 미국에서는 파나마 운하 개통을 기념하는 두 개의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미국 서부의 가장 큰 항구도시인 샌프란시스코와 운하를 지나 처음 만나는 미국의 항구도시인 샌디에이고가 서로 운하 개통 기념 국제박람회를 주최하겠다고 나섰다. 정부는 모두에 미온적이었으나, 1906년 큰 지진으로 파괴되었
던 도시의 부활을 알리고자 한 샌프란시스코의 국제박람회 개최를 승인한다. 이에 따라 파나마-태평양 국제엑스포(PPIE)가 1915년 2월에서 12월 초까지 새로 단장한 샌프란시스코 부두 지역에서 열렸다. 당시 1차 세계대전 중이었으나 31개국과 1천8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성공적인 국제박람회였다.

인구 3만여 명의 샌디에이고가 대도시 샌프란시스코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샌디에이고시는 자체 자금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1915년 초부터 2년간 국내용인 파나마-캘리포니아 엑스포(PCE)를 개최하였다.
운하 개통을 축하하는 두 엑스포 기념 종소리에는 노동자들의 아픔과 힘이 지배하던 근대 열강들의 용틀임이 함께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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