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도태우의 새론새평] 민주라는 이름의 독재

도태우 변호사 

도태우 변호사
도태우 변호사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 정권을 수사하는 검찰, 정권을 단죄하는 법원, 이 모두를 개혁 대상이라 칭하며, 아무의 말도 듣지 않고 '정권보위부'로 의심되는 공수처를 밀어붙이는 정당의 이름은, 놀랍게도 민주(民主)당이다.

민주와 독재가 동의어라는 듯한 현 정권의 오만무도함 앞에서 민주정(democracy)의 뜻을 헤아려 본다. 민주정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성기의 아테네는 군주정과 같은 1인 지배체제, 귀족정과 같은 소수 지배체제와 대비되는 다수(demos)의 지배체제(cracy), 즉 민주적 시민정치체제로 운영되었다.

민주정이 잘 운영될 때 아테네는 빈자의 자유와 귀족들의 부가 연결되고 임시방편의 포고령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다듬어진 법률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여 눈부신 번영을 이룩했다.

하지만, 민주정은 선동에 취약한 약점이 있다. 선동가가 민중을 격동시키고, 선동에 휘둘린 광장의 분노가 법치를 집어삼킬 때, 군중의 뜻으로 행해지는 즉결처분은 폭군의 독재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끝은 더 심한 독재자의 출현이었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19세기 유럽에서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역사에서 얻어진 민중독재의 경험을 합리화하여 '독재가 곧 민주'라는 충격적인 교의를 수립했다.

이들의 주장은 이러하다. 모든 것은 계급적이며 19세기 영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부르주아(자본가, 유산자) 계급이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무산자) 계급을 억압하는 독재기구일 뿐이다. 사회주의 혁명 후 자본가 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는 무산자 계급 자신에게는 '민주주의'를 행하는 것이다. 적대 계급에 대해서는 독재, 자기 계급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행하는 것이 필연적인 역사적 현실이다. 그리하여 '독재는 곧 민주'인 것이다.

이런 사상에 물든 사람들에게, 조국, 황운하, 추미애, 윤미향의 지지자들에 대한 민주는 최재형, 박근혜, 이명박, 민경욱의 지지자들에 대한 독재와 모순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당연하고 필요하기까지 하다.

이들은 심지어 4·15 총선이 부정선거였다 하더라도 무엇이 대수냐고 반문한다. "북풍 공작, 안보 이벤트를 이용한 저들의 선거는 수십 년간 언제나 부정선거였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는 독재와 같다'라는 생각의 위험성은 2천만 명을 죽인 스탈린의 강제수용소, 중국의 끔찍한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자신을 진보적 민주주의자, 인민민주주의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러한 현대적 야만의 대척점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건국 기념사에서 "민주정체에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승만은 참된 민주가 자유민주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 자유민주 정치체제의 핵심은 개개 인간의 천부인권적인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말한 개인에는 예외가 없다. 적폐 세력이기 때문에, 여론의 지탄을 받기 때문에 근본적 자유가 박탈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피와 살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근본적 자유를 법의 지배로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 자유민주 정치체제의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최근 4년간 우리 사회는 방향성의 혼란 속에 큰 진통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건국 이념과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정치 세력이 자신의 반헌법적 본질을 숨긴 채 국가 상층부를 장악한 데 있다고 본다.

자유를 얻는 것만큼이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이제라도 우린 자유와 법치가 없는 거짓 민주의 위험성을 깨닫고, 자유와 법치의 성장이란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기억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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