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다. 언제부턴가 11월이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최승자, 「삼십세」)는 시 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11월'이라는 달이 지니는 어정쩡함,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나태주, 「11월」)의 어정쩡함 때문이다. 무엇을 새로 시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 그냥 이렇게 끝내기도 뭣한 애매함 같은 것.
11월을 '지난달과 별 차이 없는 달'이라고 했다는 아메리카 인디언 엘곤퀴족의 생각도 이랬을까? 아니면 11월을 아예 '이름 없는 달'이라 불렀다는 주니족보다는 그래도 덜 비관적이라고 자위해야 할까?
테와푸에블로라는 이름의 부족은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달'이라고 하여 11월을 결실과 연결 지었다지만, "가을에 거둔 곡식 얼마나 하였는고/ 몇 섬은 환자하고 몇 섬은 왕세하고/ 얼마는 제반미요 얼마는 씨앗이며/ 도지도 되어내고 품값도 갚으리라/ 시곗돈 장릿벼를 낱낱이 수쇄하니/ 엄부렁하던 것이 나머지 바이 없다."(「농가월령가」 11월령)고 한탄한 옛 농부에겐 그 결실도 풍요와는 거리가 멀었던 듯하다.
얼마 되지 않는 소출을 쪼개 보릿고개 넘기면서 빌린 환곡 갚고 나라에 세금 바치고 제수미(祭需米)와 내년 농사 씨앗으로 또 조금 남기고 소작료와 손 빌린 일꾼들 품삯까지 제하고 나면 겉만 번지르르할 뿐 남는 게 없다는 얘기니, 결실의 계절이라 하더라도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을 터이다.
산다는 건 늘 이렇듯 팍팍한 일일진대, 한 해의 마감을 예고하는 전령(傳令)의 달이 찾아오면 마음이 허허로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혹여 월령가가 읊은 절기는 음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 지금의 시간 흐름과는 다르다고 딴지를 걸 수도 있겠지만, 11월이든 12월이든 어차피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저문 달들이니 그 차이라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일지 의문이다.
한 해를 개념 없이 너무 쉽게 살아온 건 아닐까? 올해는 꼭 이루리라던 새해 벽두의 결심까지 떠오르면 이 까닭 모를 후회와 초조의 감정은 깊어진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라고 한 시인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사람이 살다가/ 누구에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몇 사람이라도 꼭 들어줬으면 하는 말이/ 시라면//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이상국,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는 자탄은 또 어떠한가?
습관처럼 한 해를 살아오면서 '누구에겐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몇 사람이라도 꼭 들어줬으면 하는 말'이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 말을 그 '누구'에게, 그 '몇 사람'에게 건넸던가? 11월을 맞는 소회가 이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하면 "아, 나는 십일월에 생을 마치고 싶었다."(류시화, 「십일월, 다섯줄의 시」)는 시구(詩句)로 눈이 가는 것은 정해진 순서이리라.
'영원'으로 '순간'을 위로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삭이지 못한/ 가슴 속 붉은 반점"(이민우, 「단풍, 혹은 가슴앓이」)을 마침내 하나씩 내려놓는 저 나목을 보고 "나무야 떨고 섰는/ 발가벗은 나무야// 시련 끝에/ 기쁨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아침이 오고// 겨울 끝자락에/ 봄이 기다린단다."(허영자, 「나목에게」)며 짐짓 해탈의 위안을 전해도 다시 오는 그 '봄'은 억겁의 시간을 순환하는 자연의 것이지 찰나를 살다 가는 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히 바꿀 수 없다면 처연하지만 의연하게 받아들일 일이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나희덕, 「11월」)이라고. 그러면 혹 모를 일 아닌가? "갑자기 햇살이 엷어지고/ 나뭇잎 하나 툭! 떨어져 내리면/ 나도 옷깃을 여며야 한다// 내일을 기약하는 마른 풀잎처럼/ 다시 마음을 다잡으리라/ 늦어도 11월에는"(김행숙, 「늦어도 11월에는」) 하는 호기(豪氣)가 생겨,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한용운, 「님의 침묵」)붓는 일이 일어날지.
































댓글 많은 뉴스
李대통령 지지율 51.2%, 2주째 하락세…민주당도 동반 하락
"울릉도 2박3일 100만원, 이돈이면 중국 3번 가"…관광객 분노 후기
경찰, 오늘 이진숙 3차 소환…李측 "실질조사 없으면 고발"
장동혁, '아파트 4채' 비판에 "전부 8억5천…李 아파트와 바꾸자"
한동훈 "지방선거 출마 안한다…민심 경청해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