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홍준의 시와 함께] 걸어가는 길/이위발(1959~ ) 作

장날 제사상 차릴 제물 사러 가는 날, 신작로를 따라가던 어메는 아베의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뒤처져 걷는데 "퍼뜩 안 오고 뭐하노?" 아베의 지청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늘 먼저 앞서가던 아버지, 잠시, 기다린다. 어메가 "뭔 걸음이 그리 빠르니껴?" 아베의 눈빛이 흔들린다.

아베가 폐렴으로 저 세상 먼저 가던 날, 눈물 한 방울 없이 발인에도 들어오지 않고, 영정 앞에 초점 없이 앉아 계시던 어메, 상여가 장지로 올라갈 때도 뒤처져 오시던 어머니, 봉분을 쌓고 아베 옷가지를 태우며 부지깽이를 들었던 손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질 때 "느그 아베는 맨날 앞에서 빨리 오라 카디만 저래 먼저 가네"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은 오지 중의 오지. 장례문화며 이런저런 것들이 급속도로 바뀌어 갈 때도 비교적 늦게까지 옛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던 곳이다. 1980년대 후반 나는 그곳에서 만 3년을 살았다. 연탄공장 사장이랬나, 출향 사업가 중 한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고 어쩌다 나도 일당을 받고 상여꾼으로 그 장례에 참가하게 됐다. 영양초등학교 뒷산, 장지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고 좁았다. 결국 상여에서 관을 분리해 영차영차 네 사람이 목도를 해서 올라갔다. 그것은 그냥 일당을 받은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노동일 뿐. 나는 주검이 든 관을 목도해 올라가는 그 목도꾼 중 하나였다. 경건이며 애도며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 멀었다. 영양에서의 그 경험은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갔어도 여전히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55세를 일기로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다. 어머니는 장지를 정하는 일부터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쁘기만 했다. 백관들이 양쪽으로 나누어 서서 관을 들고 나가고, 내 아버지의 주검이 모셔져 있던 고향집 안방엔 굵고 흰 소금이 뿌려졌다. 나는 소금을 뿌리는 그 소리와 행위가 매우 서럽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 기억은 잊히지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내 고향 마을 뒤 개울가에는 망자의 옷가지며 이불이며 유품들을 태우던 자리가 있었다. 사람 죽지 않는 해는 없어 그곳은 늘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늘 고개를 돌리고 딴 곳을 보려고 애를 썼다.

죽음의 흔적이란 무얼까?

시인의 아버지나 내 아버지나 다 걸음이 빨랐던 분들인 것 같다. 걸음이 빨라 아내들을 남겨두고 일찌감치 이곳을 떠나가신 것 같다. 십이월이다. 겨울이다. 춥다. "느그 아베는 맨날 앞에서 오라 카디만 저래 먼저 가"버렸다는 어머니들의 깊고 외롭고 쓸쓸한 삶을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유홍준 시인
유홍준 시인

시인 유홍준: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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