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공주(樹中公主)이던가!"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문인 「산정무한」에는 자작나무를 '수중공주'에 비유했다.
한대지방을 대표하는 자작나무가 자연적으로 자랄 수 있는 남방한계선이 금강산쯤이니 남한에서는 자생하지 못한다. 2016년 5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기회가 있었는데 유리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의 '바다'를 보면서 러시아 영화나 문학작품에 이 나무가 자주 등장하는 까닭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작나무는 유럽에서 '숲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북방 민족 생활과 아주 밀접하다.
예전에 자작나무를 구경하려면 강원도 인제 원대리에 있는 조림지까지 가야 했지만 지금은 김천의 수도산(지리산에 방사한 곰이 한때 출몰했던 산)과 영양 죽파리 검마산에 1990년대에 조성한 조림지가 있어 겨울 멋을 한껏 뽐내는 장관을 즐길 수 있다. 수도산 '국립김천치유의숲' 주변 낙엽송 군락을 지나면 자작나무 숲이 능선까지 펼쳐진다. 또 영양 검마산 깊은 자락의 자작나무 숲에서는 축구장 40개에 해당하는 면적에 12만 그루가 올곧게 자라고 있다. 이 밖에 청송 무포산에도 자작나무 숲길이 조성돼 있다. 겨울 햇살을 받아 벌거벗은 자작나무의 수피는 하얗게 빛나고 하늘을 향해 솟구친 듯이 잔가지 없이 쭉쭉 뻗어 있다. 늘씬한 몸매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골짜기에서 능선 밑까지 늠름하게 도열해 있는 광경은 다른 나무숲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자작나무의 매력이다.
추운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답게 얇은 겉 매무새로 겨울을 나는 자작나무의 껍질에는 큐틴이라는 밀랍이 들어 있어 방한은 물론이고 잘 썩지 않고 곰팡이도 쓸지 않는다. 자작나무 숲을 거닐 때는 나뭇가지를 밟지 말라고 한다. 나무껍질이 멀쩡해 보이지만 나무 속은 부식돼 자칫 발이 빠지거나 다치기 쉽기 때문이다.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말안장 양쪽에 달아 늘어뜨려 흙이 튀는 것을 막는 물건)는 자작나무 수피로 만들어져 천 년 이상을 썩지 않고 견뎌왔다.
자작나무 이름은 불에 탈 때 "자작자작" 나는 소리에서 따왔다. 껍질에 불이 잘 붙어 불쏘시개로 쓰이며 오래 타고 연기도 많지 않다. 백석이 쓴 시 「백화」(白樺)에는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하략)'라고 나온다. 화력이 좋아 추운 지방에서는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이며 메밀국수 삶는 데는 제격일 것 같다.

자작나무 껍질은 한자로 화피(樺皮)다. 벚나무 껍질도 같은 한자를 쓴다. 그래서 팔만대장경판도 자작나무로 만들었다는 오해를 불러왔다. 박상진 전 경북대 교수는 '대장경이 새겨진 나무를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해 보니 대부분 산벚나무이며 일부는 돌배나무였다'고 저서에 밝혔다.
남한에 자생하는 자작나무는 없지만 형제 격인 거제수나무와 사스래나무가 한라산이나 지리산, 설악산 등 백두대간 높은 산지에 분포한다. 심산의 거제수나무는 곡우 무렵 수액을 인간에게 뺏기며 몸살을 앓는다. 사스래나무는 백두산 장백폭포 아래 소천지(小天地)에 수풀을 이루는데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대구 도심의 아파트 단지에도 자작나무가 더러 심어져 있다. '대프리카' 더위에 찌들고 미세먼지에 시달려서 시간이 갈수록 하얀 수피는 얼룩덜룩하게 변하기 십상이라 '수중공주'의 자태를 감상하기 힘들다.
내년은 흰 소띠 해.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여요(생략)'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 2절 가사처럼 자작나무 숲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새해의 '새하얀' 소망을 담아보는 게 어떨까.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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