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유독 찬란한 봄날이었다. 4월의 둘째 날, 벚꽃은 만개했다. 동기들은 벚꽃을 구경하며 봄을 만끽하였다. 이틀 전, 할머니께서 계신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몇 달 만에 본 할머니는 너무 부어있었다. 그날 너무 슬퍼서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면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오랜만에 12시 전에 잠들었고, 정말 오랜만에 푹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엄마에게 전화 한 통이 와있었다. "세연아, 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어." 그날은 참으로도 비가 궂게 내렸다.
우리 할머니는 정말 나를 예뻐하셨다. 수많은 사진에서는 할머니께서 나를 씻겨주시고, 나를 안아주시고, 나를 돌봐주고 계셨다. 그리고 어릴 때 할머니 댁이 가까워 자주 놀러가고, 또 자주 잤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입학식부터 운동회, 졸업식 등 각종 행사에는 항상 할머니께서 오셨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노란 떡볶이 코트를 입었던 날이 기억난다. 정말 내 기억 속 여러 장면마다 할머니는 늘 계셨다.
우리 할머니는 1살 때 아버지를 여의시고, 3살 때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시면서 혼자가 되셨다. 지독한 가난과 싸웠던 1940년대 고아였던 할머니께 세상은 냉혹했다. 작은어머니 손에서 자랐지만, 그들의 폭력에 시달렸다. 어려서 잘 먹지 못하고, 편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할머니의 키는 150cm도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정말 불운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부모님 없이, 어린 나이에 시집가서, 온갖 고생 다해서 자식들을 길렀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 노후에는 몸에 성한 데 없어 오래도록 고생을 하셨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할머니의 인생을 불운한 삶이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누구보다 열심이고, 누구보다도 나누는 삶이었다. 나는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받기보다 주는 것에 익숙하셨고, 늘 나눌 줄 아셨다. 나도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많이 듣는데, 할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할머니께서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의 문턱은 할머니께서 하고 싶은 말을 듣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것 때문에 더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 사실 할머니의 죽음이 슬픈 것도 있지만, 할머니께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지, 왜 우리 할머니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시지 않은 것인지 화가 났던 것도 있다.
할머니께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할머니께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 자리를 빌려 전해보고자 한다. 정말 많이 고마웠다는 말, 그리고 정말 많이 사랑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할머니께 드린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도 많이 베풀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표현에 인색해 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말도, 한껏 해드리고 싶다.
드린 거라곤 대학교 1학년 때 겨울 양말 세트밖에 없는 것 같은데, 너무 좋다면서 그걸 겨울마다 신고 계시던 할머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앞으로도 많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겠다고, 할머니께 전하고 싶다. 고마운 일이 한 두가지는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까지 나랑 동생 기다려줘서 너무 고맙다고, 손녀딸이 죄책감 안 갖게 정말 힘들었을 텐데 버텨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다. 할머니 손녀로 태어나서 정말 행복했고, 정말 고마웠고, 할머니 손녀라는 이유만으로 잘해줘서 정말 고마웠어.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 부디 편히 쉬면서 지내길 바래□. 정말 고맙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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