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이건희 소장품 기증 의미와 대구의 길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작년 가을 타계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기증 소장품을 둘러싼 지자체들의 열띤 유치 경쟁과 국민들의 관심이 전국을 강타해 왔다. 이 일은 제대로 된 미술관 설립이 여러 면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환기시켜 준다. 적정 부지 확보와 전시·공간 프로그램이 세워진 후 설계공모, 디자인·실시설계와 전시설계로 나아가야 하고, 이 과정을 견인할 전문 인력과 재원, 그리고 수집 정책과 소장품 확보 등 최소 5~7년은 잡아야 할 것이다. 물론 개관 후 운영을 위한 인력 조직, 연 단위 운영 예산 계획 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건물만 덩그렇게 먼저 짓는 과오를 범하는 정부나 지자체들을 보면 매우 안타깝다.

이건희 회장 부부의 고미술·근현대미술 수집과 삼성리움미술관의 설립, 그리고 문화 다방면 후원의 근간에는 '진정한 문화적 축적은 결국 훌륭한 작가의 배출에 달려 있다'는 신념과 책임감이 깊이 깔려 있다. 전국적인 문화예술 토양을 가꾸기 위해 별도의 기증 작품들을 작가들의 지역에 따라 안배했다. 멀고먼 강원도 양구의 작은 박수근미술관에는 박수근의 작품들을, 대구미술관에는 이인성 등 대구 지역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내주는 것이다. 이는 대구나 양구가 평상시 꾸준히 지역 출신 작가들을 부각해 지역 문화 특성을 살리려는 노력을 해온 것이 유족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본다.

박물관·미술관의 성공은 궁극적으로는 소장품의 질과 양에 달려 있다. 거기에 탄탄한 실력을 갖춘 전문 인력과 건축적인 명성만 얹으면 금상첨화 격이다. 일본의 명소가 된 예술의 섬, 나오시마(直島)는 미술관들, 현대 작가들, 유명 건축가들을 유치하고 메이지 시대 마을을 보존해 작가들의 오픈스튜디오로 활용하는 등 다양한 관광 상품을 개발, 매년 수십만의 관광객을 유치해 왔다. 이 섬에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설계한 재일 한국인 작가 이우환의 미술관도 있다. 세계적으로 현대건축의 선봉에 박물관·미술관 건축이 있어 왔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빌바오 구겐하임(프랭크 게리), 예일대 미술관(루이 칸), 퐁피두센터(렌조 피아노) 등 건축이 그 기관들의 성공과 해당 도시의 문화적 품격을 높여 준 사례들이다. 이렇게 죽어가는 도시, 한 거친 외진 섬이 재생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아 왔다.

한 도시의 발전은 문화와 교육이 같이 가야만 한다. 일례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와 뉴욕시 사이에 위치한 필라델피아시가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명문 펜실베이니아대학과 유서 깊은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학은 세계적인 교수진과 명성 높은 대학 박물관도 보유하고 있다. 대구에도 역사 깊은 명문 대학들과 대구시립미술관·국립대구박물관이 있다. 그 위에 높은 문화 의식 수준을 자랑하는 대구 광역권 시민들이 있다. 지자체와 문화 공공·민간 섹터들이 모두 힘을 합한다면 가공할 만한 경쟁력을 키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대구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 소장품 21점(이인성, 이쾌대, 서동진, 서진달, 변종하, 김종영, 문학진, 유영국의 작품)은 근대 한국미술 대표작들로 이건희 회장 유족들이 대구에 주는 큰 선물이다. 대구시와 대구미술관의 개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이를 계기로 대구미술관이 소장품을 보강하고 연구·전시 역량을 더욱 높여 이 나라를 대표하는 근현대미술관으로 우뚝 서 대구 시민의 자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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