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그믐날 밤, 메밀국수 먹는다

고선윤 백석예술대 교수

고선윤 백석예술대 교수
고선윤 백석예술대 교수

2022년 1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대체 휴일도 없으니, 새해를 맞이하는 '신정'은 여느 주말과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화되면서 만남도 이벤트도 자제하고 좀 심심한 그런 날이었다. 하기야 우리의 설은 음력 1월 1일이니, 더 기다려야 한다. 한 달 후에 우리는 우리의 설을 즐길 것이다. 그러니 서운함을 잠시 접어둬야겠다.

우리나라는 음력설을 공식적인 설날로 정하고, 양력 새해 첫날은 하루만 휴일이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나라는 양력설을 맞이하고 있으니, 세계 주요 도시에서는 다양한 새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2022년 새해는 코로나19로 이전과 같은 성대한 행사를 고집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행사가 축소됐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감동과 설렘이 있을 것이다.

일본은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1872년 태음력을 폐지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모든 행사를 양력에 따랐다. 새해를 시작하는 설 역시 양력 1월 1일이 그날이다. '음력설'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관공서나 일반 기업은 보통 12월 28일에 종무식을 하고 1월 3일까지 설 연휴에 들어간다. 그리고 보름 가까이 설 인사를 나눈다고 분주하다.

최근 일본은 코로나19 상황이 호전되었다. 그래도 도쿄 시부야역 앞에서 해마다 실시해 오던 카운트다운 행사는 지난해에 이어 취소되었다. 시부야 거리의 건물 전광판이 꺼지고 경찰이 나서서 행사 취소를 알리지만, 수많은 인파가 몰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새해를 자축했다. 그나마 메이지진구(明治神宮)의 세밑 참배가 2년 만에 재개되었다는 소식에 반가움을 표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집 안에서도 그들만의 행사를 가진다. 새해 새날을 앞둔 연휴인지라 대청소를 한다. 뒷마당 창고부터 뒤지기 시작해서 먼지를 떨고 걸레질을 한다. 연말이 되면 신문이나 SNS에 청소 도구니 청소 방법이 많이 다루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믐날 밤, 가족은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을 보면서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을 함께한다. 자정이 되면 제야의 108번 종소리가 전국 각지 절과 신사에서 울려 펴진다. 이 시간에 메밀국수(소바)를 먹는다.

구리 료헤이의 동화 '우동 한 그릇'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머니와 어린 두 아들이 섣달 그믐날 우동집을 찾아와서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우동을 한 그릇만 시킨다. 주인 아저씨는 아내 몰래 우동 반 덩어리를 더 넣어 끓인다. 맛있게 먹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새해 인사를 나눈다는 그런 따뜻한 이야기가 담긴 동화다. 여기서 '우동'이라고 번역된 것이 사실은 메밀국수이다.

일본에는 섣달 그믐날 밤에 메밀국수를 먹는 풍습이 있다. 해를 넘기면서 먹는 메밀국수라 '도시코시 소바'(年越しそば)라고 한다. 에도시대에 정착된 것인데 지금도 60%에 가까운 사람이 도시코시 소바를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 그믐날 이들이 메밀국수를 먹은 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가난하지만 남들과 같은 풍습을 따르고 싶은 작은 소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메밀국수를 먹는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가늘고 긴 국수 가락처럼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잔치국수와 같은 의미인데, 그것보다는 메밀이 잘 끊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는 해의 온갖 나쁜 것들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하고픈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더 일본다운 설명이다.

일본에서 '설'이란 원래 '도시가미'(年神)라는 신을 맞이하는 날이다. 도시가미는 일본 고유의 다신교적 신도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른바 도시가미는 일본의 수많은 신 중 정월에 찾아오는 신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일본 민속학의 개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1875~1962)는 "도시가미란 한 해의 수호신, 풍작을 가져다주는 농경신, 가족을 지키는 조상신을 하나의 신으로 신앙한 소박한 민간신"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청소를 하고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메밀국수를 먹는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끊어버리고 도시가미를 맞이하는 새해 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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