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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시대의 창] 노동조합, '지키는 조직'에서 '신뢰받는 주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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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우리는 사회가 신뢰하는 지속가능한 노조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 장관

삼성전자 임금협상 찬반투표에서 동행노조 자체 집계는 반대 8,909표에 찬성 47표였다. 같은 회사, 같은 합의안을 두고 어떤 노조는 80% 찬성, 어떤 노조는 사실상 전원 반대. 이 장면 하나가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압축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노조의 역할과 기능, 그 '성과'라는 것의 역사적·지정학적 맥락을 고려할 때 묻게 된다.

노조는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과 쟁의행위에 대한 민·형사상 면책특권을 누린다. 합법파업으로 인한 손해에는 노조의 배상책임이 없다. 이 특권은 공짜가 아니다.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기본 원리는 노동3권에도 예외가 아니다. 국제표준 ISO 26000이 기업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주체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듯,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은 조직일수록 그 권한 행사의 파급효과에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USR)이다.

대형 파업은 노사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반도체 라인이 멈추면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고, 철도·병원 파업은 국민의 이동권과 생명권을 직접 위협한다. 외부효과다. 기업이 환경오염 비용을 내부화하듯, 제3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조직 역시 그 행동의 사회적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국제노동기구(ILO)가 노조를 '사회적 파트너'로 규정하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십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조가 오직 조합원만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국가가 헌법적 특권을 부여할 근거는 사라진다.

문제의 뿌리는 더 깊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약 14%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86%는 노조의 보호 밖에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의 이익을 강하게 대변할수록 비조직 노동자와의 격차가 오히려 벌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북유럽처럼 노조가 강한 나라들은 70~80%의 높은 조직률을 바탕으로 산업 전체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임한다.

반면 조직률이 낮은 상태에서 일부 노조가 고임금과 고용 안정을 독점하면, 노조는 '노동 귀족'의 이익단체로 전락할 뿐이다. 삼성전자 DS 부문과 DX 부문 사이의 성과급 격차가 최대 100배에 달한다는 사실은, 그 역설이 노조 내부에서도 그대로 재연됐음을 보여준다.

국민 여론은 엄중하다. 한국노총 조사에서 노조 필요성에는 68.4%가 공감하면서도 52.5%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졌으며, "집단 이기주의가 심하다"는 응답이 70.8%에 달했다. 반면 '책임지는 노동운동'은 72.8점으로 모든 노동운동 방향 중 가장 높은 국민 지지를 받았고, '비정규직 보호 활동'에는 64.0%가 찬성했다.

국민은 노조의 존재는 인정하되, 지금의 투쟁 방식은 거부하고 있다. SNS 일상화시대에 도덕주의 구호나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C주의)은 오히려 반감만 키운다. 도요타가 노사 상생으로 '신뢰를 제도화'하고 기업 경쟁력과 고용 안정을 동시에 확보했듯, 이제 노조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협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국민의 지지는 도덕적 의무이기 전에 생존의 문제다. 역사는 냉정하다. 영국 대처 정부 시절 탄광노조는 국민적 지지를 잃으면서 역사적 패배를 맛봤다. 반면 폴란드 바웬사의 연대노조와 1987년 한국 노동자 대투쟁은 국민 다수의 공감대 위에서 역사를 바꿨다. 국민이 노조를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조직'으로 인식하면 제도적 보호가 강화되지만,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특권집단'으로 보면 노동3권의 기반마저 흔들린다. 결국 노동조합의 미래는 국민 여론에 달려있다.

'강한 노조'와 '책임 있는 노조'는 모순이 아니다. 독일 IG Metall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노조 중 하나이면서 독일 경제의 파트너로 인정받는 이유는 투쟁력보단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협상력 덕분이다. 신뢰 회복의 지표는 명확하다. 파업을 최후의 수단으로 제한하는 책임성,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를 품는 연대성, 노사협력을 통한 산업 기여, 운영의 투명성과 정치적 독립성 등이다.

사회적 책임은 노동운동을 묶는 족쇄가 아니라 지속 가능하게 하는 토대다. 조합원 이기주의를 넘어 비조직 노동자와 함께하는 연대의 노동운동은 선택이 아닌 시대적 책무다. 이제 노조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가 신뢰하는 지속가능한 노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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